국민들로 부터 사랑받는 팀, 근성있고 호쾌한 야구를 하는 팀!
프로야구 초창기인 1980년대 초반 삼성은 풍부한 인적 자원을 확보, 상대 팀의 부러움을 샀다. 때문에 초창기 트레이드는 필요한 선수의 확보보다 상대 팀에 대한 지원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프로야구 사상 첫 트레이드로 기록된 서정환의 해태 이적은 물론 1983년 1월 10일 정구왕(鄭丘旺·외야수)을 삼미로 보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신생 팀이 태어날 때마다 삼성은 선수 공급의 젓줄 같은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삼성라이온즈는 일본 프로야구로 눈을 돌려 1984년 재일동포 김일융(金日融)을 트레이드한 뒤 긴데스(近鐵)에서 포수로 활약했던 송일수(宋一秀)까지 영입하여 가장 안정된 배터리를 구축하게 됐다. 1985년에는 외야 보강과 1번 타자 확보 차원에서 국내 최고를 자랑하던 좌완 투수 이선희(李善熙)를 MBC 이해창(李海昌·중견수)과 맞바꾸는 과감한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특히 1985년 빙그레이글스가 창단하자 7월 26일 박찬(朴燦·중견수)을 트레이드한 뒤 8월 19일 김한근(金漢根·1루수)과 송상진(宋相振·투수)까지 지원했다. 1986년 2월 10일에는 투수 성낙수(成洛秀)를 비롯해 내야수인 임순태(林淳太), 김성갑(金性甲·2루수), 외야수 황병일(黃炳一·좌익수) 등 주전급 선수들을 빙그레로 넘겨 마운드는 물론 내·외야 보강에 힘을 실어주었다. 청보핀토스도 수혜를 받은 팀 가운데 하나다. 1986년 말 내야수 김근석(金瑾錫·3루수)과 정현발(鄭鉉發·좌익수)을 내주고 재일동포 투수 김기태(金基泰)를 끌어들인 뒤 6월에는 일본 한큐(阪急) 브레이브스로부터 투수 김성길(金誠吉)을 스카우트, 김일융이 떠난 마운드의 공백을 메꿨다. 이런 와중에서도 1987년 2월 이해창과 정진호(丁震鎬·유격수)를 청보로 보내 내·외야 수비를 한층 강화시켰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트레이드는 1988년 말 롯데와 두 차례에 걸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삼성은 에이스인 김시진을 비롯해 전용권(全勇權·투수), 오대석(吳大錫·유격수), 허규옥(許圭沃·중견수)을 내주고 롯데 에이스인 최동원(崔東原) 및 오명록(吳命錄·투수)과 김성현(金成炫·포수)을 받아들였다. 이어 간판 타자인 장효조(張孝祚·우익수), 장태수(張泰洙·투수)를 김용철(金容哲·1루수), 이문한(李門翰·투수)과 맞바꿨다. 이는 근본적인 팀체질을 개선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과감한 트레이드였다. 하지만 큰 기대를 걸었던 최동원은 실망만 안겼다. 트레이드 거부 의사를 밝힌 채 연봉 재계약을 차일피일 미루며 훈련까지 불참하는 행보를 보이다 구단의 끈질긴 설득으로 6월 23일 연봉 재계약을 마쳤지만 그답지 않은 성적(1승2패)을 내고 시즌을 마무리했다.최동원의 부진으로 투수 확보에 비상이 걸린 구단이 응급 처방을 하기 위해 끌어들인 투수가 강만식(姜晩植)이었다. 강만식은 해태의 창단 투수로 1987년 4월 빙그레에 트레이드되어 1988년 11월 임의탈퇴한 신분이어서 빙그레의 이적 동의가 필요했다. 5월 13일 빙그레에 복귀한 뒤 트레이드하는 절차를 밟아 삼성 유니폼을 입었지만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5경기에서 1패(방어율 7.94)라는 참담한 성적을 남기고 은퇴했다. 1990년 11월 2일 취임한 김성근 감독은 투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OB에서 구원 전문 투수 윤석환(尹錫環)과 포수 조범현(曺凡鉉)을 끌어들였다. 1991년 1월에는 1루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강영수(姜永壽·1루수)와 OB 신경식(申慶植·1루수)을 맞바꾼 뒤 외야 수비와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1988년 롯데로 떠나 보냈던 허규옥을 다시 끌어왔다. 그러나 팀 성적은 나아진 것이 없었다.
1991 시즌 가까스로 3위를 차지,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에 패해 한국시리즈는 밟아 보지도 못했다. 재일동포 김성길(16승)과 신인 이태일(10승) 및 류명선(11승), 성준(8승), 김상엽(6승) 외에는 투수가 없었다. 이 때부터 구단은 투수 보강에 비상이 걸렸다.1992년 시즌이 끝난 11월 ‘제2의 장효조’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외야수 정성룡(鄭成龍)을 해태에 내주고 무명 투수인 김승남(金承南)을 받은 것도 투수난을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투수 김성길과 1루수 신경식을 쌍방울로 넘겼다. 김성길은 투수로서 수명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36살의 나이로 17경기에서 1승7패1세이브(방어율 5.14)에 그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대신 ’93 신인 정영규(鄭榮圭)에 대한 지명권을 넘겨 받아 외야 보강에 도움을 받았다.
1993년은 신인인 잠수함 투수 박충식(朴衷湜)의 입단으로 숨통이 트였다. 1992년 입단한 김태한과 함께 젊은 투수들이 주축을 이루게 됐다. 그러나 경기 운영 능력이 뛰어난 투수가 필요했다. 노장 성준이 버티고 있었지만 불안을 떨칠 수 없어 1월 빙그레 투수 한희민(韓禧敏)을 끌어들였다. 내야수 박철희(朴哲熙)와 맞바꾼 것이다. 한희민은 1986년 빙그레에 입단, 주전 투수로 활약했으나 1992년 2승5패로 부진을 보였다. 하지만 셋업 맨으로서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나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마운드가 안정되자 포수진이 문제였다. 1993 시즌 들어 포수 이만수의 급격한 체력 저하로 김성현이 주전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김성현이 전 경기를 끌고 나갈 수는 없었다. 김성현의 뒤를 받쳐줄 제3의 포수가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14일 유망주로 주목받던 투수 이상목(李相睦)을 내주고 끌어온 포수가 빙그레의 박선일(朴善一)이었다. 특히 8월 31일에는 미국 대학야구에서 MVP를 수상한 재미동포 투수 다니엘 최(崔龍熙)를 스카우트, 큰 기대를 걸게 했다. 그러나 최용희가 과대 포장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1994년에는 시즌이 끝난 뒤 세이브 투수 보완과 체질 개선 차원에서 단 한 차례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팀이 5위로 전락한 데 따른 응징적인 의미도 담고 있었다. 트레이드는 12월 1일 한화(빙그레)를 상대로 이루어졌다. 내야수 정경훈(鄭京勳)과 외야수 정영규(鄭榮圭)를 내주고 투수 장정순(張定淳)과 외야수 이정훈(李政勳)을 받아들였다. 투수 장정순은 위기에서 불을 꺼줄 소방수로 필요했다. 악바리로 소문난 이정훈은 선수들에게 투지와 패기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장정순은 1996 시즌 3승7패4세이브(방어율 3.63)로 제 몫을 다했을 뿐 1997 시즌 7경기에서 1승만을 건져 유니폼을 벗었다. 이정훈도 2시즌을 보낸 뒤 1996년 11월 OB로 트레이드됐다.
박동희는 한물 간 투수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강속구만은 여전히 위력적이어서 선발투수 보강과 큰 경기에서의 경험을 높이 판단했다.
1995년 5월 10일에는 쌍방울의 왼손잡이 투수 최한림(崔翰林)을 잡기 위해 우완 투수 류명선(柳明善)과 김현욱(金玄旭)을 내놨다. 1989년에 데뷔한 류명선은 입단 첫 해 14승8패1세이브(방어율 3.85)로 선풍을 일으켰던 선발 투수였다. 1992 시즌부터 하향세를 보인 뒤 1994 시즌에는 2승5패4세이브(방어율 4.26)에 그쳐 위기를 맞았었다. 김현욱도 비슷한 처지였다. 1993년 데뷔했으나 6경기에서 승패 없이 방어율 2.45를 기록한 뒤 94년 초 허리부상을 입어 자유계약선수 신분으로 2군에서 재활훈련 중이었다. 그러나 김현욱은 쌍방울로 옮긴 3년 뒤 재기에 성공, 구원 투수로 20승2패6세이브(방어율 1.88)라는 놀라운 성적을 내 투수부문 3관왕(다승, 방어율, 승률)을 차지하게 된다. 이에 비해 최한림은 3승1패를 올린 뒤 1997 시즌이 끝나자 은퇴했고 덤으로 넘겨 받은 외야수 윤혁(尹赫)은 5경기에서 단 한 개의 안타도 못 뽑은 채 그 해 말 유니폼을 벗었다. 특히 12월 13일에는 미국 프로야구에서 기량을 가다듬은 우완 투수 최창양(崔昌洋)을 필라델피아 필리스로부터 넘겨 받아 국내 프로야구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1994년 계약금 4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건너간 최창양은 필리스 산하 싱글 A팀인 바타비아 클리퍼스에서 1년간 활동했지만 성적은 1승3패(방어율 4.96)로 부진했다. 그러나 구속 150km대의 강속구를 자랑하는 우완 정통파 투수로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 업 등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투수였기에 누가 보더라도 탐나는 선수였음은 틀림없었다.
백인천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1996년은 근성 있는 야구를 심기 위한 전환기적인 성격을 띤 해였다. 카리스마가 누구보다 강했던 백인천 감독은 5월 25일 동봉철( ·외야수)과 김태룡(金泰龍·내야수)을 해태에 내주고 김훈(金勳)과 이병훈(李炳勳)을 불러들였다. 해태에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선수들이었지만 근성이 강하고 장타력을 보유한 이들이어서 결정적일 때 대타로 쓰기 위해서였다. 또 선수들의 이완된 정신력에 자극을 주기 위해 시즌이 끝난 뒤 김성현(포수)과 이종두(李鍾斗·내야수)를 쌍방울로 보냈다. 대신 ’97신인지명권을 넘겨 받아 10월 31일 신인 2차지 명에서 내야수 정회선(鄭會先)을 지명했다. 근성의 표본으로 삼성 유니폼을 입었던 이정훈이 다시 트레이드된 것은 1996년 11월 10일 포수 보강 차원에서 OB의 포수 박현영(朴顯音英)과 외야수 강영수(姜永守)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면서였다. 또한 훈련에 태만했던 강기웅(姜起雄)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1996년 11월 18일 현대 최광훈(崔光勳·투수), 이희성(李熙成·외야수)과 트레이드됐지만 강기웅은 현대 이적을 거부해 유니폼을 벗었다. 1997년 6월 27일에는 삼성의 꿈나무들인 1995년 신인왕 이동수(李東洙·내야수)와 박석진(朴石鎭·투수)이 롯데 박동희(朴東熙·투수), 김종훈(金鍾勳·내야수)과 트레이드됐다. 박동희는 한물간 투수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강속구만은 여전히 위력적이어서 선발 투수 보강과 큰 경기에서의 경험을 높이 판단했다. 하지만 기대 이하의 실력을 보여 실망을 안겼다. 오히려 대타감으로 기용하기 위해 받아들인 김종훈이 매끄러운 수비와 깔끔한 타력으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전으로 발탁됐다.
1997년 6월 27일에는 삼성의 꿈나무들인 1995년 신인왕 이동수(내야수)와 박석진(투수)이 롯데 박동희 (투수), 김종훈(내야수)과 트레이드 됐다. 박석진의 투구 모습.
대타감으로 기용하기 위해 받아들인 김종훈은 매끄러운 수비와 갈끔란 타력으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전으로 발탁됐다.
1999년은 투수들을 리드할 포수 보강에 집중됐다. 7월 31일 OB가 1997년 계약금 3억 8천만원을 주고 스카우트한 포수 진갑용을 현금 4억원+이상훈(투수)에 트레이드 했다.
1998년 11월 3일 외야수 최익성과 함께 박태순(투수)을 한화에 넘겨준 뒤 노장진을 끌어왔다. 노장진은 한화의 말썽꾸러기 투수. 하지만 노장진은 사자 유니폼을 입은 뒤 1999 시즌 33경기에서 15승 9패(방어율 4.35)라는 놀라운 성적을 냈다.
1998년을 대비해 투수력 보강차원에서 이루어진 트레이드가 해태의 조계현(趙啓顯)을 현금 트레이드한 것이었다. 1997 시즌 4년 만에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 LG에게 패하자 전수신(全秀信) 사장은 서정환(徐定煥) 코치를 감독에 앉힌 뒤 투수 영입에 발벗고 나섰다. 패배의 원인을 투수의 열세로 본 탓이다. 때문에 시즌이 끝나자 중점적인 투수 보강 차원에서 11월 10일 해태 조계현을 현금 4억원에 트레이드하는 데 성공했다. 또 12월 30일에는 OB에서 포수 김광현(金洸鉉)을 트레이드, 양용모(梁龍模), 김영진(金榮振)으로 불안한 포수진을 강화했다. 그러나 삼성야구 사상 최대의 트레이드는 1998년 시즌이 끝난 후 이루어졌다. 조계현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전수신 사장은 1998년 플레이오프에서 LG에 또 패하자 본격적인 투수 사냥에 나섰다. 1998년 11월 3일 꿈나무로 애지중지 키워온 외야수 최익성(崔益誠)과 함께 박태순(朴太淳·투수)을 한화에 넘겨준 뒤 노장진(盧長震)을 끌어왔다. 노장진은 한화의 말썽꾸러기 투수였다. 공주고에 재학 중이던 1992년 청룡기대회에서 노히트노런을 수립하며 우승을 일굴 정도로 우수한 투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3년 한화에 입단한 후 임의탈퇴로 퇴출까지 당해 3년간 군 생활을 겪기도 했다. 1997년 2월 한화에 복귀했으나 재기 성공여부는 불투명했다. 하지만 노장진은 사자 유니폼을 입은 뒤 효자가 된다. 1999 시즌 33경기에서 15승9패(방어율 4.35)라는 놀라운 성적을 낸 것이다. 노장진의 최다승은 1998 시즌 7승(10패)이 고작이었다. 전 사장의 투수 사냥은 노장진에서 끝나지 않았다. 12월 14일 양준혁(梁埈赫)을 해태 구원투수 임창용(林昌勇)과 바꾼 것이다. 물론 곽채진(郭採振·투수), 황두성(黃斗聖·포수)도 해태에 함께 넘겼다. 빅딜은 계속 이어졌다. 12월 25일 양용모(梁龍模·포수), 이계성(李啓星·외야수) 외에 현금 20억원을 풀어 쌍방울의 기둥 타자 김기태(金杞泰·내야수)와 구원 투수 김현욱(金玄旭)을 넘겨 받았다. 5일 뒤(12월 25일)에는 OB로부터 김상진(金尙珍)을 6억5,000만원에 사들였다. 이로써 기라성 같은 투수들이 4명이나 합류, 투수 왕국을 방불케 했다. 1999년은 이 투수들을 리드할 포수 보강에 집중됐다. 7월 31일 OB가 1997년 계약금 3억8,000만원을 주고 스카우트한 포수 진갑용(陳甲龍)을 현금 4억원+이상훈(투수)에 트레이드했다. 그러나 더욱 놀랄 일은 시즌이 끝난 뒤 일어났다. 11월 29일 FA(프리 에이전트)로 나온 해태 잠수함 투수 이강철(李强喆)을 8억원에 3년간 계약한 뒤 12월 3일에는 LG의 대형 포수 김동수(金東洙)까지 8억원으로 3년 계약을 끝낸 것이다. FA란 10년간 활동한 선수에게 재계약권을 부여한 것으로 1999년에 처음으로 시행됐다. 10년간 활동한 선수는 모두 17명(투수 9명, 야수 8명)이었으나 자격을 신청한 이들은 5명(투수 4명, 야수 1명)으로 이들 가운데 이강철과 김동수가 포함됐다.2000년에는 신필렬(辛弼烈) 사장이 바통을 이어 받아 사령탑에 대한 손질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뛰어난 용병술로 해태를 9번 우승시킨 김응룡 감독을 프로야구 사상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대우로 스카우트했다. 5년 계약에 계약금 3억원, 연봉 2억원이었다. 코칭스태프도 대부분 교체했다.
2001년 우승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이기도 했다. 1월 31일 롯데의 강타자이자 1루수인 마해영(馬海泳)을 신인 유망주 김주찬(金周燦·내야수) 및 이계성(李啓星)과 바꿔 강타선을 정비했다. 또 3월 21일에는 좌완 투수의 필요성에 따라 해태의 유망주 강영식(姜永植)을 신동주(申東宙·외야수)와 트레이드했다. 빼어난 타격 솜씨와 빠른 발을 지닌 신동주는 한마디로 말해 놓치기 아까운 선수였다. 1990년 12월 꿈나무 육성책의 일환으로 입단, 2군에서 기량을 닦은 뒤 5년 만에 주전 자리를 꿰차 주위를 놀라게 한 입지전(立志傳)적인 선수였던 것이다. 2001년 7월 30일 이강철을 해태로 되돌려 보낸 것은 FA 및 노장 선수들에 대한 경고 메시지이기도 했다. 한국시리즈에 상관없이 분위기 조성을 위해 대대적인 물갈이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또 패했다. 하지만 많은 교훈을 남겼다.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이들은 하나의 점(点)으로 쌓은 모래성 같았다. 끈질긴 선(線)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2002 시즌을 위한 또 하나의 빅딜은 12월 16일 단행됐다. 왼손 투수 및 유격수 보강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불필요한 선수들을 정리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투수 김상진(金尙珍), 김태한(金泰漢), 이용훈(李勇勳), 포수 김동수(金東洙), 내야수 김기태(金杞泰), 정경배(鄭慶培)를 SK에 내주고 왼손 투수 오상민(吳相玟), 용병 유격수 틸슨 브리또 외에 현금 11억원을 받는 선에서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이 트레이드는 삼성에게 절실했던 유격수, 왼손투수에 대한 고민과 고액연봉 노장선수들에 대한 처리를 한꺼번에 해결한 획기적인 트레이드였다.
프로야구 첫 트레이드는 1982년 12월 7일 서정환(徐定煥)이 테이프를 끊었다. 삼성라이온즈의 창단 멤버이기도 했던 서정환은 해태타이거즈의 요청으로 유니폼을 바꿔 입었지만 말이 많았다.프로야구가 갓 출범한 첫 해인데다 첫 트레이드이고 보니 구단은 한동안 ‘좋은 선수를 쫓아냈다’는 여론에 시달렸다. 그럴 만도 했다. 선수를 주고 받았다면 이런 오해는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서정환의 몸에는 현금 1,300만원이라는 이적료가 붙어 있었다. 지금은 트레이드가 보편화되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트레이드’란 ‘필요 없는 선수를 쫓아내는 것’쯤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삼성에는 서정환 외에 오대석이 유격수로 버티고 있었다.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유격수들이었다. 하지만 서영무 감독은 찬스에 강한 오대석을 애지중지했다. 서정환은 47경기에 출전한 반면 오대석은 72경기에 출전, 타율 0.283을 올려놓고 있었다. 더욱이 6월 12일 부산(구덕) 삼미전에서 프로야구 첫 사이클링 히트까지 기록해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이 됐다. 오대석이 버티고 있는 한 서정환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것이 당연했다. 그렇다고 재기 발랄한 선수를 썩힐 수는 없었다. 서정환도 살리고 해태도 돕는 길을 택해 시집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1983년 페넌트레이스에서 서정환의 활약은 눈부셨다. 내야 수비의 핵으로 해태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 서정환은 1989년까지 7년간 해태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한국시리즈에서 5차례에 걸쳐 우승을 일궈냈다.
서정환의 성공 신화는 선수 은퇴 후에도 계속됐다. 1990년 해태 수비 코치를 맡아 한국시리즈에서 2차례 우승(1991, 1993년)을 엮어낸 뒤 1995년 삼성의 부름을 받았다. 해태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동했으므로 몸으로 익힌 노하우를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해태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서정환 코치의 복귀는 1년 뒤로 늦춰졌다. 서정환 코치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일본에 건너가 야구연수를 받을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서정환은 구단의 주선으로 5월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에 합류, 7월까지 수비 코치 연수를 받고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2년 뒤인 1997년 10월 30일에는 삼성의 제9대 감독에 취임했다. 삼성 선수 출신으로는 사실상 첫 감독이기도 했다. 1992년 감독을 맡았던 우용득(禹龍得)을 선수 출신 첫 감독으로 꼽고 있으나 주업은 코치였다. 선수로는 14경기에 주전이 아닌 대타 또는 대주자로 출전했을 뿐이다. 서정환 감독의 등장으로 팀 분위기도 새롭게 바뀌었다. 젊은 감독답게 투지와 패기로 팀을 이끌어 1998년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 뒤 1999년에는 12년 만에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과시했다.프로야구 트레이드 2호도 삼성라이온즈에서 배출했다. 1983년 1월 10일 삼미슈퍼스타즈의 요청으로 외야수이자 강타자였던 정구왕(鄭丘旺)을 트레이드했다. 약팀의 지원과 외야수 적체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구왕은 이렇다 할 활약 없이 1986년 시즌이 끝나자 은퇴했다.
재일동포 선수 영입은 1982년 말 국내 프로야구의 질적 향상과 전력 보강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추진됐다. 일본 프로야구에 밝은 장훈(張勳)을 내세워 6명의 투수들을 일괄적으로 스카우트, 1982 시즌 성적을 역순으로 6개 구단에 배분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일괄 스카우트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일동포 선수들은 많았지만 갓 출범한 국내 프로야구에서 뛰기를 희망하는 선수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은퇴를 눈앞에 둔 선수가 아니고는 모험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때문에 일괄적인 스카우트는 1983년 1월 삼미와 계약한 장명부(張明夫·투수), 이영구(李英求·유격수) 및 2월 해태와 입단 계약을 마친 주동식(朱東植·투수)과 김무종(金戊宗·포수)을 끝으로 구단별 스카우트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삼성은 1984년 1월 1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재일동포 투수 김일융(金日融)을 1천만엔에 현금 트레이드한 뒤 긴데스(近鐵) 버팔로즈에서 포수로 활약한 송일수(宋一秀)를 스카우트하며 본격적인 ‘재일동포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이들이 몸담고 있던 3년은 삼성의 전성기였다. 1984년 전기리그 우승에 이어 1985년에는 전·후기리그를 제패,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통합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86년 시즌을 끝으로 계약이 만료된 김일융과 송일수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삼성 마운드를 지킨 재일동포 투수는 1986년 청보핀토스가 스카우트한 김기태(金基泰)였다. 1986 시즌이 끝난 12월 26일 김근석(金瑾錫), 정현발(鄭鉉發)과 트레이드되어 삼성 유니폼을 입은 김기태는 몸값에 버금가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 1억5,000여만원의 연봉을 받았지만 성적은 17경기에서 7승5패(방어율 4.74)에 그쳐 실망을 안겼다. 그런 점에서는 1987 시즌 중반 스카우트한 김성길(金誠吉)도 비슷했다. 1987년 6월 27일 계약금 1억원에 입단한 김성길은 11경기에 등판했다. 하지만 성적은 1패3세이브(방어율 3.19)로 형편없었다. 김성길이 기대 이하로 부진하자 히로시마(廣島) 카프에서 정용생(鄭龍生)을 3천만원에 트레이드해왔다.
선수 | 위치 | 기간 | 계약금 | 총연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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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융 | 투수 | 1984-86년 | 81,351 | 525,860 |
송일수 | 포수 | 1984-86년 | 30,000 | 108,941 |
김기태 | 투수 | 1987년 | 153,052 | |
김성길 | 투수 | 1987-92년 | 100,000 | 263,327 |
정용생 | 투수 | 1988-89년 | 55,670 | |
송광훈 | 투수 | 1989-90년 | 102,088 | |
최일언 | 투수 | 1991-92년 | 107,000 | |
강춘경 | 외야수 | 1992-94년 | 20,000 | 36,000 |
강태윤 | 외야수 | 1992-95년 | 56,000 | |
한명호 | 투수 | 1992-95년 | 20,000 | 80,000 |
김 실 | 외야수 | 1993-95년 | 146,000 | |
김귀홍 | 포수 | 1995-98년 | 64,000 |
정용생은 1982년 일본 프로야구 드래프트 4위로 히로시마에 입단했으나 5년간 2군에서 기량을 다듬고 있던 투수였다. 그러나 1988 시즌 성적은 10경기에서 3패(방어율 7.71)만을 당했다. 오히려 김성길이 회생의 기미를 보여 38경기에서 8승4패6세이브(방어율 2.80)를 올렸다. 정용생이 맥없이 물러난 1989년 큰 기대를 안고 입단한 투수가 송광훈(宋光訓)이었다. 일본 대학야구에서 4년간 21승9패(방어율2.63)를 올린 송광훈은 1984년 일본 프로야구 드래프트 1위로 계약금 6,000만엔을 받고 다이요(大洋) 훼일스에 입단한 투수였다. 그러나 송광훈도 2년간(1989∼90년) 1승3패(방어율 9.92)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에 반해 김성길은 착실하게 기량을 가다듬어 1989년 34경기에서 14승11패2세이브(방어율 2.81)로 10승대 투수로 발돋움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12경기에서 완투한 끝에 완봉승만 4차례 거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또한 1990 시즌에는 13승6패3세이브(방어율 3.79)를 올려 에이스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김성길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91 시즌 16승12패18세이브(방어율 3.30)를 끝으로 사양길에 접어들어 1992년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다. 김성길은 삼성에서 6년간 활동했다.
성적도 통산 185경기에서 52승41패33세이브(방어율 3.32)를 올려 일본 프로야구에서 9년간 78경기에 등판한 끝에 거둔 1승7패2세이브(방어율 4.89)와 좋은 대조를 보였다. 김성길은 한마디로 말해 김일융의 경우처럼 삼성에서 재기에 성공한 투수였다. 김성길 이후 재일동포 선수들로 두산에서 트레이드한 최일언(崔一彦·1991∼92년)을 비롯해 외야수인 강춘경(姜春敬·1992∼94년), 강태윤(姜泰允·1993∼95년), 투수 한명호(韓明浩·1993∼95년) 등이 입단했으나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야수들 가운데서는 1993년 12월 입단한 외야수 김실(金實)만큼 잘한 선수도 없었다. 1994 시즌 좌익수로 타율 0.273을 기록한 김실은 1995 시즌 타율이 0.201로 떨어져 쌍방울로 트레이드됐지만 야수로 주전 자리를 꿰찬 선수는 1984년 포수 송일수 이후 처음이었다. 김실 이후 포수 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김귀홍(金貴弘)을 스카우트, 5년간 2군에서 뜸을 들이기도 했으나 만족할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재일동포 투수 김일융(金日融)은 구단이 직접 교섭에 나서 트레이드를 성공시켰다.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에 이적료를 지불하고 재일동포 선수를 트레이드한 첫 케이스가 됐다. 1983년 장명부나 주동식을 스카우트할 때만 해도 이적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이들은 이미 소속 구단에서 자유계약선수로 방출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일융의 경우는 달랐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그를 잡고 있어 이적료를 물어야 했다. 그것도 헐값이 아니었다. 김일융은 1983 시즌 일본 프로야구에서 31경기에 등판, 3승2패(방어율 3.21)로 부진한 성적을 보였다. 1968년 고교 2학년을 중퇴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스카우트되어 만 15년을 활동한 투수였다. 나이도 32살, 한물간 투수임엔 틀림없었지만 요미우리 구단은 이적료로 3,000만엔을 요구하고 나왔다. 우리 돈으로 1억원에 가까운 액수였다. 은퇴를 눈앞에 둔 투수치고는 비싼 편에 속했다. 그러나 이달종(李澾鍾) 이사가 전면에 나서면서 양상은 달라졌다. 1984년 1월 13일 일본 요미우리 구단 사무실에서 이적료 1,000만엔(약 3,200만원)에 김일융을 넘겨 받기로 합의를 했다. 김일융과는 계약금 2,000만엔, 연봉 2,500만엔 등 4,500만엔(약 1억4,400만원) 외에 아파트(40평형) 전세 비용(2,000만원)과 승용차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입단 계약을 마쳤다. 김일융의 영입은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것만큼이나 김영덕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984년 김일융은 전·후기리그에서 38경기에 등판, 16승10패3세이브(방어율 2.27)의 성적을 올려 팀을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는 데 앞장을 섰다. 그러나 롯데와 맞붙은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4 - 3으로 앞서던 8회초 유두열(柳斗烈)에게 3점 홈런을 허용, 역전패로 우승을 놓쳐 두고두고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삼성야구 20년 사상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85년 34경기에서 25승6패(방어율 2.79)를 기록, 김시진(25승5패10세이브)과 함께 50승을 거두는 놀라운 성적을 냈다. 팀 전체가 올린 77승 가운데 65%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후기리그를 제패, 프로야구 사상 길이 남을 ‘통합 우승’을 실현함으로써 찬란한 금자탑을 세웠다. 김일융은 3년 계약에 따라 1986년 13승4패(방어율 2.53)를 올린 뒤 일본 프로야구 복귀를 꿈꾸며 돌아갔다. 3년간 91경기에서 54승20패3세이브(방어율 2.53)를 올린 것이다. 하지만 김일융은 1984년 요미우리를 떠날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꿔져 있었다. 김일융이 훗날 밝혔듯 국내 프로야구에서 완급조절 요령을 터득한 뒤 1985년 미국 플로리다 전지훈련에서는 LA 다저스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가 던지는 포크 볼을 익혀 전혀 다른 투수로 변신한 상태였다. 이런 변화는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감지하고 있었다. 계약기간 만료를 앞두고 다이요(大洋) 훼일즈를 비롯해 요미우리 자이언츠, 야쿠르트 등 3개 구단에서 김일융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융은 삼성의 보류선수로 묶여 있어 일본으로 자유롭게 복귀할 수는 없었다. 삼성구단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것은 1984년 요미우리에서 김일융을 트레이드할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김일융 트레이드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다이요 훼일스는 이적료 외에 재일동포 투수 한 명까지 준비해 놓고 협상을 요청해 왔다. 12월 3일 다이요 구단 히사노 사장은 삼성그룹의 일본 현지법인인 삼성재팬 사무실에서 김일융의 이적료 3,000만엔과 재일동포 유망주인 투수 송광훈(宋光訓)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트레이드에 합의했다. 3,000만엔은 김일융을 트레이드할 때 지불한 1,000만엔보다 3배나 많은 액수였다. 당시 환율로 계산할 경우 2억원에 가까운 큰 돈이었다. 그러나 송광훈은 1988년 12월 16일 유학생 신분으로 입단, 2년간 16경기에서 1승3패(방어율 9.92)라는 저조한 성적을 낸 뒤 돌아갔다.
1987년 6월 27일 일본 프로야구 한큐(阪急) 브레이브스에서 트레이드한 김성길(金誠吉)도 1982년 재일동포 일괄 스카우트 계획에 포함됐던 투수였다. 그러나 소속 구단에서 유망주라는 이유로 트레이드를 거부, 5년이 지난 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모국 땅을 밟았다. 김성길의 트레이드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1986년 11월 24일 박영길 감독이 지휘봉을 잡는 조건으로 이종기(李鍾基) 사장에게 김일융에 버금 가는 대형 투수 영입을 약속 받은 직후였다. 김일융이 3년 계약기간을 채우고 떠난 뒤여서 확실한 투수는 김시진밖에 없다는 것을 이 사장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시진은 페넌트레이스용이었지 포스트시즌용은 아니었다. 때문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보다 확실한 대형 투수가 필요했다. 첫 표적은 김성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성길은 1977년 일본 프로야구 드래프트 6위로 한큐에 입단, 9년간 78경기에서 1승7패2세이브(방어율 4.89)를 올린 스리쿼터형의 투수였다. 나이도 31살로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한큐와 우호관계에 있던 해태가 한발 앞서 한국야구위원회를 통해 신분조회를 요청한 뒤 구단간 접촉을 통해 승낙을 얻어놓고 있었다. 문제는 김성길의 의향이었다. 김성길은 한큐 구단의 일방적인 결정에 반발, 삼성행을 요구하고 있었다. 해태나 한큐 구단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김성길이 완강하게 버티자 1월 22일 임의탈퇴선수 공시라는 극약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삼성이 스카우트할 경우 이적료를 받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일본프로선수회가 ‘선수의 의사를 존중해 줄 것’을 건의하는 등 김성길의 편을 들고 나서자 한큐 구단도 할 수 없이 김성길의 삼성행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성길은 7개월이라는 길고 긴 투쟁 끝에 6월 27일 삼성의 품에 안겼지만 이 해 성적은 보잘 것이 없었다. 후기리그부터 11경기에 등판, 1패3세이브(방어율 3.19)에 그쳤다. ‘트레이드 파동’에 휘말려 몸을 만들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이듬 해인 1988년도 크게 좋아진 것은 없었다. 38경기에서 8승4패6세이브(방어율 2.80)에 머물렀다. 하지만 1989년에는 34경기에서 14승11패2세이브(방어율 2.81)를 올렸다. 놀라운 것은 12경기에서 완투한 끝에 4경기 완봉승을 거둔 일이다. 김시진의 롯데 이적으로 썰렁해진 마운드에 신인 류명선(柳明善·14승8패1세이브)과 함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김성길은 1990년에도 34경기에서 13승6패3세이브(방어율 3.79)를 기록, 에이스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해 신인 이태일(李太逸)은 바람같이 나타나 노히트노런(8월 8일 사직 롯데전)까지 수립하며 13승6패를 기록, 김성길과 함께 다승 공동 5위에 올랐다. 시즌을 앞두고 2월 필리핀 전지훈련에서 마티 코치로부터 투구 폼 교정을 받은 게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김성길은 1991년 가장 안정된 피칭으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화려한 불꽃을 피워 올렸다. 1990년 11월 6일 지휘봉을 잡은 투수 조련사 김성근 감독의 조언을 받아들여 구원투수로 변신한 김성길은 52경기에서 16승12패18세이브(방어율 3.30)라는 놀라운 성적을 냈다. 다승 3위의 성적이었다. 이 가운데 구원승은 12승으로 30세이브 포인트를 획득, 쌍방울 조규제(曺圭帝·34포인트)에 이어 구원부문 2위에 올랐다. 삼성야구 사상 16승 투수를 배출한 것은 1987년 김시진의 23승6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삼성의 구원투수로 30세이브 포인트(종전 김상엽 1990년 26포인트)를 달성한 것도 처음이었다. 김일융이 그러했듯 힘보다 완급조절로 타자들을 요리한 덕분이었다. ‘부시 맨’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몸이 비실비실했던 김성길은 1989년까지만 해도 힘의 피칭을 구사했다. 그 좋은 예가 8월 1일 대구에서 벌어진 해태전이다. 이 경기에서 김성길은 홈런 4개를 얻어 맞으며 완투한 끝에 승리(6 - 5)를 지켜 ‘한 경기 최다 피홈런 승리투수’의 기록을 안게 됐다. 힘을 뺀 1991년에는 7월 5일부터 10일까지 5경기에서 연속 세이브를 성공시켜 ‘팀 연속경기 최다 세이브’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7월 6일 인천에서 벌어진 태평양전에서는 재일동포 정문언(鄭文彦)을 상대로 16개의 공을 던져 ‘1타자 최다 투구수’의 기록도 세웠다. 기록은 또 있다. 9월 7일 대구에서 벌어진 롯데와의 연속경기 1, 2차전을 승리로 이끌어 ‘더블헤더 연속 승리투수’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김성길도 체력의 데드 라인은 존재했다. 1992년 급격한 체력 저하로 17경기에서 1승7패1세이브(방어율 5.14)로 한계를 드러내 11월 26일 1루수 신경식과 함께 쌍방울로 트레이드됐다.
선수로서는 인연이 없었지만 코치로 인연을 맺은 재일동포 선수는 투수 장명부(張明夫)와 포수 김무종(金戊宗)이었다. 장명부는 잘 알다시피 1983년 전력 평준화 차원에서 삼미가 영입한 투수였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한물간 투수였지만 갓 출범한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한 시즌 30승을 올리는 등 불후의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장명부도 체력 앞에서는 허약한 투수였다. 1985년 11승25패5세이브(방어율 5.30)로 주저앉자 신생 팀 빙그레이글스로 트레이드되었고 1986 시즌을 끝으로 오갈 데 없는 떠돌이가 됐다. 22경기에서 1승18패(방어율 4.98)에 그친 탓이다. 투수로서 수명을 다한 셈이었다. 하지만 삼성의 지휘봉을 잡은 박영길(朴永吉) 감독은 그를 투수 코치로 기용, 새로운 야구 인생의 길을 열어주었다. 노하우가 탐이 났던 것이다. 투수들을 지도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코치들이 장명부의 일거일동을 보고 배우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투수 장명부는 성공했지만 코치로서의 장명부는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1989년 롯데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1991년 1월 11일 배터리 코치로 영입한 김무종도 해태타이거즈에서 6년간 이름을 날린 포수였다. 1972년 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廣島) 카프에 입단한 김무종은 1983년 2월 4일 해태에 입단하기 전까지 2군 포수로 뛰었다. 하지만 고국 무대에 데뷔한 첫 해 주전 포수로 한국시리즈 첫 우승의 밑거름이 됐다. 뿐만 아니라 1986년 우승을 시작으로 1988년까지 3년 연속 해태를 정상에 올려 놓기도 했다. 그러나 장채근(張彩根)의 성장으로 설 자리를 잃게 되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퇴했다.
이런 김무종을 배터리 코치로 영입한 것은 그가 지닌 능력을 높게 평가한 탓이었다. 1991년만 해도 삼성은 이만수 외에 박정환(朴貞煥), 조범현(曺凡鉉), 김성현(金成炫) 등 쟁쟁한 포수들이 안방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김성현을 제외한 3명은 은퇴를 눈앞에 둔 노장들이어서 체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때문에 보다 젊고 강한 포수를 조련할 코치가 필요했다. 김무종을 불러들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2진급 포수들에게 일본과 해태에서 쌓은 노하우를 전수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김무종은 자신을 코치로 픽업한 김성근 감독이 1992년 10월 4일 중도 해임되자 미련 없이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프로야구 개막전의 만루홈런(MBC 이종도), 1982년 한국시리즈 만루홈런(OB 김유동)으로 패배의 멍에를 썼던 이선희(李善熙)의 트레이드는 1985년 1월 13일 이루어졌다. MBC청룡의 외야수 이해창(李海昌)과 맞바꾼 것이다. 그는 프로야구 개막전을 시작으로 38경기에 등판, 15승7패1세이브(방어율 2.91)를 올려 국내 최고의 좌완 투수로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1983년 29경기에서 5승13패(방어율 3.76)에 그친 뒤 1984년에는 2승4패(방어율 4.53)로 처져 전력에는 크게 보탬이 안됐지만 트레이드나 은퇴를 고려할 만큼 최악의 상태는 아니었다. 이선희는 근성이 강한 투수였다.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만루홈런 한방으로 비운의 투수가 됐지만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 한국시리즈 6차전 중 다섯 경기에 등판, 31과⅓이닝을 던질 만큼 대단한 투지를 지니고 있었다. OB를 우승시킨 박철순(朴哲淳)도 3경기에서 15와⅔이닝을 던졌고 권영호도 4경기에서 10과⅔이닝, 황규봉은 3경기서 11과⅓이닝을 던졌을 뿐이다. 또 팬들에게는 삼성하면 이선희가 연상될 만큼 강한 이미지를 심어준 투수여서 트레이드란 생각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1984년 재일동포 투수 김일융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자 왼손잡이 투수를 갈망하던 MBC가 이선희의 트레이드를 제의해 왔다. 상대는 때리고 달리는 데 도가 튼 이해창이었다. 마침 발 빠른 1번 타자감을 찾고 있던 김영덕 감독에겐 희소식이었다. 또 김일융의 영입으로 입지가 좁아진 이선희에게는 선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되기도 했다. 이선희의 트레이드를 발표하던 날 구단은 이례적으로 이선희의 백 넘버 26번을 결번으로 남겨 놓아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훗날 이선희가 선수 또는 코치로 복귀할 경우에 대비한 구단의 마음이었다. 그만큼 구단은 물론 이선희도 트레이드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선희는 1982년 서정환, 1983년 정구왕에 이어 삼성야구 사상 3번째로, 그것도 선수 대 선수의 맞교환으로는 최초로 트레이드됐다. 이해창 트레이드는 성공이었다. 어깨가 약한 것이 흠이었지만 빠른 발과 재치 있는 타격으로 1번 타자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에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이해창은 신인들의 성장으로 1987년 2월 28일 유격수 정진호(丁震鎬)와 함께 청보핀토스로 트레이드되었다. 2년간 204경기에 출전, 타율 0.347에 홈런 10개, 타점 62점, 도루 21개를 기록했다. 이선희는 1987년 시즌을 끝으로 MBC에서 은퇴, 1988년부터 빙그레에서 코치생활을 시작했다. 삼성과 인연을 다시 맺은 것은 1991년. 삼성 투수코치로 부임, 3년간 활동한 뒤 한화(1994∼2000년)를 거쳐 2000년 11월 12일 다시 투수 코치로 부임해 왔다.
한국야구 사상 최대의 트레이드로 꼽히는 김시진·장효조의 트레이드는 1988년 말 롯데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두 차례에 걸쳐 단행된 이 트레이드는 분위기 쇄신과 약점 보완 차원에서 팀의 기둥인 에이스를 포함해 우수 선수들을 맞바꾼 것이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88년 11월 22일 단행된 이 트레이드는 에이스 김시진을 포함해 전용권(全勇權·투수), 오대석(吳大錫·유격수), 허규옥(許奎沃·외야수)과 롯데의 에이스 최동원(崔東原) 및 오명록(吳命錄·투수), 김성현(金成炫·포수)을 맞바꾸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상상을 초월한 이 트레이드를 놓고 야구 관계자들은 ‘구단의 반란’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대형 트레이드는 그 해 1월 이미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1월 23일 구단은 간판 타자 장효조(張孝祚)를 트레이드 시장에 공개적으로 내놓은 일이 있다.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에 4연패를 당하자 취약한 투수진을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대상은 10승대 투수였다. 그러나 현금을 내놓겠다는 구단은 있어도 투수를 내놓겠다는 구단이 없어 장효조 트레이드는 불발로 끝났다.
대형 트레이드가 고개를 든 것은 1988년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에게 3연패를 당한 뒤였다. 한국시리즈에 이어 플레이오프의 참패는 팀 전체를 회오리바람에 휘말리게 했다. 에이스 김시진도 있었고 노장 권영호도 있었다. 재일동포 김기태(1987년)와 김성길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단 1승도 건지지 못해 포스트시즌 7연패를 당하자 구단은 사상 처음 그룹 감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포스트시즌에 약한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간판 스타의 트레이드는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최동원 같은 투수가 절실하다는 감사 결과를 토대로 구단은 본격적으로 교섭에 나섰다. 롯데도 최동원과의 연봉 싸움으로 지쳐 있었다. 90만원을 놓고 연초부터 연봉 싸움을 벌여 6월말에 매듭지을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게 파인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시즌 후에는 선수회 창립을 주도, 구단과는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의 앙금까지 남겨 김시진과의 맞교환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 됐다. 전용권과 오대석 및 허규옥을 내주고 오명록과 김성현을 받은 것은 분위기 쇄신과 약점 보완을 위해서였다. 내야수 오대석을 내놓아도 걱정이 없었다. 2루수 김성래, 3루수 김용국, 유격수 류중일이 스타급으로 성장한 데다 신인으로 강기웅이 입단할 예정이어서 철옹성을 방불케 했다.
외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롯데는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난 재일동포 홍문종(洪文宗)을 대신할 중견수로 발 빠르고 타격과 수비가 수준급인 허규옥을 끌어 갔지만 구윤(具潤)을 비롯한 2세대들이 중심 축을 이루고 있었다. 걱정은 노쇠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 주전 포수 이만수였다. 수비 부담을 덜어줄 제2포수를 찾고 있던 중이어서 김성현의 트레이드는 안성맞춤이 됐다. 그러나 롯데와의 대형 트레이드는 12월 20일 또 한 차례 이루어졌다. 간판 타자인 장효조와 김용철, 좌완 투수인 장태수와 이문한을 주고 받았다. 장효조 트레이드는 지난 1월 거론됐다 철회한 뒤여서 누구도 예상을 못했다. 하지만 분위기 쇄신과 장거리 타자 확보를 위해 김용철과 트레이드됐다. 장효조는 6년 연속 3할대의 타율을 기록하며 4회에 걸쳐 타격왕을 수상한 뛰어난 타자였다. 그러나 김시진의 경우처럼 큰 경기에 약한 흠을 안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 실책을 범하든가 무기력하게 물러나 간판 타자다운 투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김용철 역시 미운 털이 박히기는 마찬가지였다. 1988 시즌이 끝난 직후 선수회 파동에 휘말려 구단이 요구한 ‘각서 제출’을 거부, 롯데 구단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94 시즌을 대비해 삼성이 준비한 최대의 카드는 재미동포 투수 최용희의 스카우트였다.
미국 필라델피아 필리스 최창양과는 1995년 12월 13일 역대 신인 최고액에 정식으로 계약을 끝냈다.
1994 시즌에 대비해 삼성이 준비한 최대의 카드는 재미동포 투수 최용희(崔龍熙·다니엘 최)의 스카우트였다.최용희 스카우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장안의 화제거리가 됐다. 지금까지 재미동포가 국내 무대에서 활동한 예는 많았다. 하지만 구단의 필요보다 선수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용희는 이들과는 달랐다. 구단이 발벗고 나서서 정식으로 스카우트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정식 계약은 1993년 8월 31일 서울 구단 사무실에서 아버지(崔茂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계약금 4억원에 연봉은 3,500만원이었다. 이는 1992년 LG에 입단한 투수 이상훈(李尙勳)의 2억원(계약금 1억 8,000만원, 연봉 2,000만원)을 곱 이상 능가하는 국내 최고액이었다. 최용희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게 된 배경은 그가 미국 대학야구에서 보여준 성적 때문이었다. 지난 6월 롱비치 주립대 주전투수로 미국 대학야구 4대 리그 가운데 하나인 ‘빅 웨스트 컨퍼런스’에 참가, 소속 팀을 4강에 끌어올리며 최우수선수로 뽑히자 구단은 최용희의 스카우트 작업에 들어갔다. 우완 정통파 투수로 시속 1백45km의 빠른 볼을 주무기로 변화구를 구사하는 최용희는 미국 대학야구 20경기에서 17승2패(방어율 2.47)를 기록했다. 그러나 미국 프로야구 1994 시즌 신인지명에서 오클랜드에 14번째로 지명되자 삼성 행을 결심하게 됐다. 최용희의 영입은 1993 시즌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우용득 감독에게 별을 달아준 격이 됐다. 확실한 선발 투수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용희는 하와이 윈터 리그에서 어깨 부상을 입어 우용득감독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 감독은 이때만 해도 최용희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1994 시즌에 대비해 실시할 호주와 일본 전지훈련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2일간에 걸쳐 실시할 이 훈련을 겪고 나면 완벽한 투수로 변신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94 시즌 최용희가 보여준 성적은 1승2패1세이브(방어율 5.48)였다. 그것도 6경기에 등판해 올린 성적이었다. 팀 성적도 곤두박질쳤다. 포스트시즌 진출과는 거리가 먼 5위였다. 결국 최용희 영입에 앞장섰던 김흥민(金興敏) 사장은 구단을 떠나야만 했다. 최용희는 한 시즌을 더 버텼다. 1995년 백인천 감독 밑에서 4경기에 등판했지만 승패 없이 방어율만 5.40을 기록했다. 31타자를 상대로 6과⅔이닝을 던져 4점을 내준 게 전부였다. 최용희에 실망한 구단은 새로운 투수 물색에 나섰다.
1994년 중앙대 3학년에 재학 중이다 계약금 4만 달러(약 3,200만원)에 미국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스카우트된 최창양(崔昌洋)이었다. 필리스 산하 싱글 A팀인 바타비아 클리퍼스에서 올린 1994 시즌 성적은 1승3패(방어율 4.96)로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볼 스피드는 152km를 기록할 정도로 빨랐다. 이 정도의 투수라면 미국에서는 흔할지 모르지만 국내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투수였다. 곧 트레이드 작업에 들어갔다. 연초부터 교섭을 거듭한 끝에 12월 4일 이광진(李光珍) 사장이 김종만(金鍾滿) 스카우트 부장을 대동하고 미국에 건너갔다. 필라델피아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최창양 트레이드는 이적료 20만 달러(약 1억6,000만원)에 합의를 보았다. 최창양과는 12월 13일 정식으로 계약을 끝냈다. 계약금 5억원에 연봉 4,000만원이었다. 이적료까지 합치면 7억원이 됐다. 당시 신인 최고 대우를 받은 이정길이 LG로부터 3억8,000만원(계약금 3억6,000만원, 연봉 2,000만원)을 받았으니 최창양은 역대 신인 최고액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최창양의 피칭과 훈련 태도를 지켜본 백인천 감독은 머리부터 저었다.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잘하면 5∼6승으로 예상했다. 1996 시즌 성적은 백 감독이 예상한 대로 6승10패(방어율 3.86). 데뷔 6년을 맞은 2001년까지 6승의 벽을 허물지 못했다.
1998년 12월 14일 왼손잡이 슬러거 양준혁과 해태 구원 전문 투수 임창용의 트레이드를 성공시켰다.
삼성야구 역사상 전수신 사장처럼 의욕과 투지를 불태운 이도 드물다. 1996년 12월 23일 삼성라이온즈의 제7대 대표이사로 부임하기 무섭게 우승의 염원을 풀기 위해 선수들을 독려하고 나섰다. ‘부정 배트 시비 사건’과 백인천 감독이 뇌출혈로 쓰러지는 악조건 속에서 페넌트레이스 4위를 차지, 4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문을 열었다. 그러나 1997년 플레이오프에서 LG에 2-3으로 패해 한국시리즈 진출이 막히자 투수 사냥에 발벗고 나섰다. 마운드의 열세를 뼈저리게 실감한 탓이었다. 전 사장에게 한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투수는 해태의 조계현이었다. 조계현은 본인 스스로 해태에 트레이드를 요구해온 터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전 사장은 선발 투수 보강 차원에서 영입을 결정한 뒤 해태 마의웅 사장과 담판 끝에 1997년 11월 9일 현금 4억원에 트레이드하기로 합의를 봤다. 뒤를 이어 해태가 자유계약선수로 푼 이순철(李順喆)까지 연봉 4,000만원에 입단시켰다. 이순철에게 큰 기대를 걸기보다 선수들에게 근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전수신 사장이 본격적으로 투수 사냥에 나선 것은 것은 1998년이었다. 11월 4일 연습생에서 슬러거로 성장한 최익성(崔益誠)과 투수 박태순(朴太淳)을 한화에 내주고 미완의 대기로 평가 받던 노장진(盧長震)을 받아들여 선발 투수진을 강화한 뒤 12월 14일에는 왼손잡이 슬러거 양준혁과 구원 전문 투수 임창용(林昌勇)의 트레이드를 성공시켰다. 임창용을 끌어오기 위해 2진급 투수 곽채진(郭採振)과 포수 황두성(黃斗成)을 함께 보냈지만 이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하나의 사건이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양준혁은 삼성야구의 얼굴이자 간판 타자였다. 데뷔 첫 해인 1993년 팀 사상 첫 신인왕의 영광을 안겼던 양준혁은 6년 연속 3할대의 타율을 지키며 3회에 걸쳐 타격왕에 올라 장효조 이후 최고의 타자라는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성적에 비해 팀에 대한 공헌도가 낮아, 투수력 보강에 중점을 두었던 전 사장의 눈에는 임창용과 같은 유능한 투수가 더 절실해 보였다. 전 사장의 선수 사냥은 12월 25일에도 계속됐다. 쌍방울에서 투수 김현욱(金玄旭)과 왼손잡이 1루수 김기태(金杞泰)를 20억원에 사들여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현욱은 중간 계투 요원을 확보하기 위해, 김기태는 양준혁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영입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12월 30일에는 OB의 선발 투수 김상진(金尙珍)을 현금 6억5,000만원에 끌어들였고 1999년 7월 31일에는 4억원에 포수 진갑용(陳甲龍)까지 받아들여 OB 배터리로 중무장 하는 등 그 어느 팀에 뒤지지 않는 투수왕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기라성 같은 투수들을 거느리고도 큰 경기에 약한 징크스를 깨지는 못했다. 1999년 큰 기대를 걸었던 조계현은 8승11패(방어율 5.21)로 실망을 안겼다. 트레이드할 당시만 해도 최소 3년간 활동하며 연간 10승 이상은 무난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급격한 노쇠 현상으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여 2000 시즌이 끝나자 자유계약선수로 방출했다. 쌍방울에서 10승대 투수로 재기에 성공한 김현욱도 6승4패1세이브(방어율 3.97)에 머물렀다. 제 몫을 한 투수는 김상진이었다. OB에서의 부진(1998년 8승8패)을 딛고 일어나 12승7패(방어율 4.67)를 기록했다. 한편 노장진과 임창용은 삼성의 투수 트레이드 사상 재일동포인 김일융(1984∼86년), 김성길(1987∼92년) 이후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혔다. 한화에서 말썽꾸러기로 따가운 눈총을 받았던 노장진은 33경기에 등판, 생애 최다승인 15승9패(방어율 4.35)라는 성적을 올려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한화에서 올린 최다승은 1998 시즌에 거둔 7승(10패)이었다. 임창용도 마찬가지였다. 본인 생애 최다인 71경기에 등판, 13승4패38세이브(방어율 2.14)를 기록했다. 삼성 투수로는 최초로 방어율 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또한 팀 사상 최다 세이브(38)와 최다 세이브 포인트(51)를 기록,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밑거름이 됐다.
1999년 11월 11일 감독을 김용희로 교체한 전수신 사장은 FA로 풀린 선수들을 염두에 두고 해태가 계약을 포기한 투수 이강철을 입단시켰다
그러나 천하 제일을 자랑하던 임창용의 뚝심도 큰 경기에 약한 삼성의 숙제를 풀지 못했다. 롯데와 맞붙은 플레이오프 4차전까지 삼성은 3승1패로 앞서 있었다. 1승만 건지면 4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다. 5차전은 9회 초까지 5 - 3으로 리드하고 있었다. 9회 말, 한 이닝만 잘 지키면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마운드도 천하 무적인 임창용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임창용은 롯데 용병 호세의 홈런 한방에 무릎을 꿇었다. 1사 1, 2루에서 3점 홈런을 얻어맞아 5 - 6으로 패한 것이다. 3승3패로 승리의 향방을 놓고 다툰 7차전에서도 임창용은 노장진을 구원 등판한 끝에 역전패를 당해 한을 남겼다. 그렇다고 투지가 꺾일 전 사장은 아니었다. 11월 11일 감독을 김용희(金用熙)로 교체한 전 사장은 FA(자유계약선수)로 풀린 선수들을 염두에 두었다. 해태가 계약을 포기한 투수 이강철(李强喆)과 LG가 잡지 못한 대형 포수 김동수(金東洙)를 입단시켰다. 이강철은 10년간 해태 마운드를 지키며 뛰어난 경기 운영 능력으로 10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쌓아 올린 잠수함 투수였다. 그러나 1999년에는 오른쪽 무릎 십자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으로 단 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기 운영 능력이 뛰어난 투수여서 무릎 상태가 정상을 유지할 경우 최소 10승까지도 가능한 선수라 11월 29일 계약을 마쳤다. 보상 선수로 박충식을 내주고 3년간 연봉 5억8,000만원, 옵션 2억2,000만원 등 8억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재활로 2년을 허비한 끝에 2001년 7월 30일 기아로 재트레이드됐다. LG의 주전 포수였던 김동수와는 12월 3일 3년간 8억원에 계약을 끝냈다. 김동수는 공격형의 포수로 수비 폭도 넓고 찬스에 강했다. 주전 포수 11년의 경력이 말해주듯 노련한 투수 리드가 빼어났다. 포수 겸 지명타자로 활용하기 위해 잡았다. 그러나 우승은 너무도 먼 곳에 있었다. 어렵게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현대의 힘에 눌려 한국시리즈 진출의 꿈을 또 날려야 했다.
LG의 주전 포수였던 김동수와는 12월 3일 3년간 8억원에 계약을 끝냈다. 김동수는 공격형의 포수로 수비 폭도 넓고 찬스에 강했다.
FA 선수 양준혁의 재영입이 2001년 12월 21일 이루어졌다. 4년간 계약금 10억원, 연봉 3억3,000만원 등 총 23억2,000만원(플러스옵션 4억원, 마이너스옵션 6억원)에 입단 계약을 마쳤다. 특히 이번 계약에서는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옵션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새로운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2001 한국시리즈 준우승은 충격이었다. 페넌트레이스 1위라는 강자의 위치를 희석시킨 것이어서 그 파장은 클 수밖에 없었다. 2002 시즌을 위한 재건 계획은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지체없이 시작됐다. 신필렬(辛弼烈) 사장과 김재하(金載夏) 단장을 비롯한 각 부서 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각적인 측면에서 의견 교환과 분석이 이루어졌다. 결론은 한 가지로 집중됐다. 팀 분위기 쇄신이었다. 불필요한 선수들을 대대적으로 트레이드, 취약한 포지션을 강화한다는 데 의견을 합치시켰다. 삼성야구 재건을 위한 트레이드 전략이 세워진 것은 11월 초순이었다. FA 선수들인 김상진(金尙珍·투수), 김동수(金東洙·포수), 김기태(金杞泰·1루수) 등을 포함해 투수 김태한(金泰漢)이 트레이드 대상에 올랐다. 상대 팀은 전력 보강에 열을 올리고 있는 SK. 좌완투수 오상민(吳相玟)과 외국인 용병 틸슨 브리또(유격수)를 놓고 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SK는 투수 이용훈(李勇勛)과 2루수 정경배(鄭慶培)를 추가로 요구해 왔다. 12월 14일 합의를 본 이 트레이드는 선수 6명을 내주고 현금 11억원 외에 왼손 투수와 유격수를 얻었지만 수적으로 보면 당연히 손해였다. 그러나 질적인 면에서 보면 손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연봉을 축내는 FA선수들을 포함해 투수 김태한은 어떤 방식으로든 트레이드 할 수밖에 없는 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투수 김상진은 1998년 12월 30일 현금 6억5,000만원에 두산에서 트레이드한 뒤 2000년 11월 12일 FA 자격을 취득, 12월 4일 4년간 계약금 4억원 연봉 1억5,000만원(총 6억원) 등 10억원에 계약한 투수였다. 그러나 2001시즌 성적은 16경기에서 2승3패2세이브(방어율 7.04)에 그칠 정도로 부진했다. 더욱이 한국시리즈에서는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전력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왼손 투수인 김태한은 1997 시즌 8승7패23세이브(방어율 2.61)를 끝으로 4년간 부상의 터널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2000 시즌부터 마운드에 올랐지만 2년 연속 승패 없이 방어율 4.57(2000년), 11.57(2001년)을 기록했다.
삼성야구 재건을 위한 트레이드 전략이 세워진 것은 2001년 11월 초순. FA 선수들인 김상진, 김동수, 김기태를 포함해 투수 김태한 등이 트레이드 대상에 올랐다. 상대 팀은 전력 보강에 열을 올리고 있는 SK. 좌완투수 오상민과 유격수 브리또를 놓고 협상이 시작됐다. 사진은 2001년 12월 16일 트레이드된 오상민.
2001 한국시리즈 준우승은 충격이었다. 페넌트레이스 1위라는 강자의 위치를 희석시킨 것이어서 그 파장은 클 수밖에 없었다. 2002 시즌을 위한 재건 계획은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지체없이 시작됐다. 신필렬(辛弼烈) 사장과 김재하(金載夏) 단장을 비롯한 각 부서 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각적인 측면에서 의견 교환과 분석이 이루어졌다. 결론은 한 가지로 집중됐다. 팀 분위기 쇄신이었다. 불필요한 선수들을 대대적으로 트레이드, 취약한 포지션을 강화한다는 데 의견을 합치시켰다. 삼성야구 재건을 위한 트레이드 전략이 세워진 것은 11월 초순이었다. FA 선수들인 김상진(金尙珍·투수), 김동수(金東洙·포수), 김기태(金杞泰·1루수) 등을 포함해 투수 김태한(金泰漢)이 트레이드 대상에 올랐다. 상대 팀은 전력 보강에 열을 올리고 있는 SK. 좌완투수 오상민(吳相玟)과 외국인 용병 틸슨 브리또(유격수)를 놓고 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SK는 투수 이용훈(李勇勛)과 2루수 정경배(鄭慶培)를 추가로 요구해 왔다. 12월 14일 합의를 본 이 트레이드는 선수 6명을 내주고 현금 11억원 외에 왼손 투수와 유격수를 얻었지만 수적으로 보면 당연히 손해였다. 그러나 질적인 면에서 보면 손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연봉을 축내는 FA선수들을 포함해 투수 김태한은 어떤 방식으로든 트레이드 할 수밖에 없는 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투수 김상진은 1998년 12월 30일 현금 6억5,000만원에 두산에서 트레이드한 뒤 2000년 11월 12일 FA 자격을 취득, 12월 4일 4년간 계약금 4억원 연봉 1억5,000만원(총 6억원) 등 10억원에 계약한 투수였다. 그러나 2001시즌 성적은 16경기에서 2승3패2세이브(방어율 7.04)에 그칠 정도로 부진했다. 더욱이 한국시리즈에서는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전력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왼손 투수인 김태한은 1997 시즌 8승7패23세이브(방어율 2.61)를 끝으로 4년간 부상의 터널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2000 시즌부터 마운드에 올랐지만 2년 연속 승패 없이 방어율 4.57(2000년), 11.57(2001년)을 기록했다.
한편 FA 선수 양준혁의 재영입이 12월 21일 이루어졌다. 양준혁은 1998년 12월 14일 해태 임창용과 트레이드된 뒤 2000년 3월 24일 LG 투수 손혁(孫奕)과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두 시즌을 LG에서 뛴 양준혁은 9년 연속 3할대 타자를 유지할 만큼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강타자였다. 특히 2001 시즌 타율 0.335로 수위타자에 오르며 FA 자격까지 획득했다. 그러나 소속 구단 LG는 양준혁이 제시한 몸값 36억원에 놀라 계약을 포기한 상태였다. FA 선수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지 못한 구단은 양준혁 영입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11월 28일 김응룡 감독의 요청으로 재검토한 끝에 영입을 성사시켜 4년간 계약금 10억원, 연봉은 3억3,000만원 등 총 23억2천만원(플러스옵션 4억원, 마이너스옵션 6억원)에 입단 계약을 마쳤다. 특히 이번 계약에서는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옵션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새로운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2002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왼손 투수 오상민과 유격수 브리또를 보강한 김응룡 감독은 이승엽을 선(線)으로 묶어줄 왼손 타자가 필요했다. 바로 양준혁이었다. 묘하게도 양준혁의 영입은 1998년 12월에 있었던 빅딜과 비슷했다. 당시 구단은 양준혁을 트레이드한 뒤 쌍방울에서 김기태를 끌어들여 양준혁의 공백을 메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반대로 빅딜을 성공시켜 이승엽, 양준혁, 마해영으로 이어지는 국내 최고의 클린업 트리오를 형성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