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라이온즈21 | 1장 서설

국민들로 부터 사랑받는 팀, 근성있고 호쾌한 야구를 하는 팀!

야구 구장 사진

이건희 구단주의 결단

不蜚不鳴 雄飛 三星’ 삼성라이온즈가 20년간의 숙원을 풀며 그토록 기다렸던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루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삼성은 참으로 멀고도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198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포문을 연 삼성은 1985년에는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며 프로야구의 명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시리즈와는 인연이 멀어 2001년까지 7차례나 우승의 문턱에서 주저앉아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2002년을 맞이하는 삼성은 여느 해와는 달랐다. 7전8기의 투혼으로 무장한 삼성 앞에 더 이상 한국시리즈 징크스는 없었다. 어느 드라마보다 감동적이었던 2002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지난 20년간의 한을 모두 날려 버리고 진정한 명문구단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라이온즈의 지난 20년은 한마디로 말해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사령탑이 11번이나 바뀌었고, 숱한 선수들이 회한을 씹으며 그라운드 저편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삼성은 그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언제나 한국 프로야구를 리드해온 선각자였다. 삼성라이온즈의 파란만장한 드라마는 프로야구 창립을 주도하고 이 땅에 프로야구의 역사적인 개막경기의 주인공으로 선을 보이면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1981년 5월 정부가 “국민에게 건전한 오락과 화제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프로야구 창설을 논의할 때 이건희 구단주는 가장 먼저 용단을 내리며 기업의 프로야구 참여를 유도했다.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과 지역 발전을 위한 국민 대화합 차원에서 용단을 내린 것이었다.

이건희 구단주는 1981년 12월 11일 프로야구 창립총회가 끝나자 대구·경북지역을 연고지로 한 삼성라이온즈의 창단을 서둘러 12월 14일 서울 사무소(삼성 본관 6층)에서 6개 구단 가운데 가장 먼저 팀을 발족시켰다. 삼성라이온즈가 타 구단에 앞서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구단주의 야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이건희 구단주는 한 구단의 구단주이기 전에 선수들에겐 자상한 어버이이기도 했다. 선수들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저 없이 받아들여 원년(1982년)부터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중에서도 선수들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해외의 유명 야구인사들을 초빙하여 선수들의 마음가짐과 기초 실력을 다지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삼성라이온즈를 방문했던 유명 인사 속에는 일본 프로야구의 거물 나가시마(長嶋茂雄)와 스기시다(杉下茂)를 비롯해 미국의 홈런왕 행크 에런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건희 구단주의 야구사랑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82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국내 프로야구 팬들에게 선사했다. 미국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팀을 초청, 메이저리그의 수준 높은 경기를 선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내 프로야구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한큐(阪急) 브레이브스의 명 코치인 재일동포 이충남(李忠男)을 조감독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브레이브스의 초청과 이충남의 영입은 당시로써는 상상도 못 할 파격적인 조치였다. 1985년에는 삼성라이온즈가 전·후기 통합 우승을 차지하자 선수들에게 값진 선물을 했다. 전천후 종합 훈련장 ‘삼성라이온즈 볼파크’의 건설이었다. 1986년에 착공하여 1996년 대대적인 현대화 공사를 거치면서 ‘삼성라이온즈 볼파크’는 동양 최대의 야구타운으로 거듭났다.

대지 1만1,566평 위에 전광판과 나이트타워, 관람석까지 갖춘 주경기장과 실내연습장, 체력단련동 등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며 무명선수를 스타로 키워내는 야구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건희 구단주는 지역 야구 발전과 육성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1989년 직장 및 사회인들의 단합과 화합을 위해 사회인야구대회를 창설했고 1990년에는 어린이여름야구교실을 열어 아마야구의 저변 확대와 이해 증진에 앞장섰다. 또 그해 9월 15일 삼성리틀야구단을 발족시켜 꿈나무 육성과 발굴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92년에는 대구·경북지역 초등학교야구대회를 열었고, 1993년부터는 이를 발전시킨 삼성기 타기 대구·경북지역 초·중·고야구대회를 개최해 이승엽(李承燁)을 비롯해 이정호(李正浩), 김수관(金秀官), 김승관(金承管), 배영수(裵英洙), 김진웅(金珍雄)과 같은 꿈나무와 스타들을 발굴해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995년에는 제주도에 삼성기 타기 제주지역야구대회를 신설해 연고지인 대구·경북이 아닌 타 지역의 야구발전에도 정성을 기울이는 등 범야구 발전에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프로야구탄생

프로야구의 탄생은 제5공화국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국민에게 건전한 오락과 화제를 제공, 흩어진 민심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근본 취지였다. 또 기업에게는 이윤의 사회 환원과 지역의 발전을 유도, 국민 대화합을 이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는 의도에서 프로야구가 추진됐다. 프로야구의 창설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1년 6월 청와대 비서실 수석 비서관회의에서였다. 이상주(李相周) 교육문화담당 수석비서관의 주도로 축구협회와 야구협회에 의향을 타진했다. 하지만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오히려 재야 야구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중에서도 통합 대한야구협회서 전무이사와 운영부장을 맡았던 이용일(李容一) 씨와 이호헌(李虎憲) 씨의 열의는 대단했다. 이상주 교문수석에겐 더없이 반가운 이들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해 문화방송(MBC)이 창사 20주년 기념사업으로 프로야구팀 창단을 발표하며 야구의 프로화는 움직일 수 없는 프로젝트로 굳어졌다. 프로야구 창립 작업은 이호헌, 이용일 씨가 만들고 이상주 교문 수석비서관이 사인한 ‘한국프로야구 창립계획서’라는 18면짜리 청사진에 의해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 권한지역과 선정기업 ◎
구장 권한지역 선정기업체
제 1 안 제 2 안
서울 서울일원 MBC 두산(OB)
부산 부산·경남 롯데 럭키금성
대구 대구·경북 삼성
(중앙일보)
포항제철
인천 인천·경기·강원 한국화장품 한진(KAL)
대전 충남·충북 한국화약 동아건설
광주 전남·전북 삼양사
(동아일보)
해태·미원

또 프랜차이즈는 참여 기업 총수 출신의 도(시)별로 정하되 참여 기업의 조건은 ①재무구조가 튼튼한 대기업체 ②경쟁 대상인 동 업종은 제외하고 ③기업 전체의 종업원 수가 3만명 이상인 업체가 우선하여 ④프로야구 발전에 관심 있고 성의가 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이러한 4가지 조건에 따라 선정된 기업은 표와 같았다. 삼성이 대구·경북지역을 연고지로 한 기업체들 가운데 제1순위에 오른 것은 당연했다. 삼성의 창업주이자 총수인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출신지(경남 의령)를 기준으로 할 경우 연고지는 부산·경남지역이 옳았다. 그러나 대구는 그룹의 발상지라는 점이 총수의 출신지보다 우선순위로 꼽혔다. 오늘의 삼성은 1938년 3월 1일 대구 서문시장 근처인 수동(현재 대구시 중구 인교동 61-1)에 삼성상회를 설립하면서 시작된 것이었기에 삼성 관계자들은 어느 누구 하나 연고지 문제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삼성의 프로야구 참여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독자적으로 프로야구 창단 계획을 발표했던 MBC 외엔 그 어느 기업도 선뜻 나서질 못한 채 정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프로야구를 창단할 경우 선수단(선수, 코치, 감독) 계약금과 연봉 및 구단 운영비와 경상지출 등을 합치면 연간 7억원 이상의, 당시로써는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데다 프로야구의 흥행도 불투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81년은 제2차 유류파동이 일어나 경제사정이 전반적으로 어려웠던 상황이어서 기업체마다 축소 경영을 지향하던 시기였다. 이런 시점에서 삼성의 프로야구 참여 결정은 정부 쪽에 힘을 실어주는 촉매제가 됐다. 뿐만 아니라 삼성은 10월 하순 이건희(李健熙) 부회장의 지시로 구단 창설 요원 인선작업에 들어가 김동영(金東永)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관리본부장을 프로야구 실행이사로 선임해 프로야구 창립 작업과 야구단 창단을 진두지휘케 하는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프로야구 창립총회는 서울을 원한 두산의 연고지 문제와 해태의 참여를 꺼리는 롯데의 반발 등으로 진통을 거듭했다. 하지만 프로야구 탄생을 열망하는 대세에 눌려 롯데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두산은 3년 뒤 서울 환도를 보장받는 선에서 합의를 봐 1981년 12월 11일 오후 2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역사적인 창립총회로 결실을 보게 됐다.

◎ 6개 구단의 권한 지역과 참여기업 ◎
구단명칭 구단주 창단감독 권한지역 참여기업
MBC청룡 이진의 백인천 서울일원 문화방송
롯데자이언츠 신준호 박영길 부산·경남 롯데
삼성라이온즈 이건희 서영무 대구·경북 삼성
삼미슈퍼스타즈 김현철 박현식 인천·경기·강원 삼미
OB베어스 박용곤 김영덕 충청남북도 두산
해태타이거즈 박건배 김동엽 전라남북도 해태

이날 총회에는 6개 구단주들을 대리한 삼성 김동영(金東英·동방생명 관리본부장), MBC 김병주(金丙注·관리이사), OB 권태명(權泰鳴·두산기획 상무이사), 삼미 이혁근(李赫根·상무이사), 해태 김명하(金明河·해태제과 관리이사), 롯데 한영국(韓英國·롯데제과 상무이사) 등이 프로야구 실행이사로 참석, 6개 구단의 프랜차이즈로 서울지역은 MBC(구단 명칭 미정)가, 부산 및 경남지역은 롯데(롯데자이언츠), 대구 및 경북지역은 삼성(삼성라이온즈), 충남·북지역은 두산(OB베어스), 인천 및 경기·강원지역은 삼미(삼미슈퍼스타즈), 전남·북지역은 해태(해태타이거즈)가 각각 맡는 것으로 확정했다. 이어 프로야구의 뼈대인 정관을 통과시킨 뒤 프로야구의 얼굴인 초대 커미셔너로 서종철(徐鐘喆) 반공연맹 이사장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또한 신임 총재는 프로야구 살림을 도맡을 사무총장에 이용일(李容一·전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 사무차장에 이호헌(李虎憲·전 대한야구협회 운영부장) 씨를 제청, 선임함으로써 한국프로야구위원회(KPBC)의 골격을 갖추게 됐다.

삼성라이온즈 발족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과 코치 및 국가대표급 선수들로 구성된 삼성라이온즈는 막강한 전력으로 타 구단을 압도했다. 서영무 초대감독은 대구상고 출신으로 1967년 경북고 창단 감독을 맡아 70년대 ‘경북고 전성시대’를 연 ‘대구·경북 야구의 대부’였다. 고교와 대학 감독을 역임한 15년간 각종 전국 규모 대회에서 22회 우승이라는 기록을 남긴 명 감독이었다. 코치로 내정된 임신근(林信根) 씨와 우용득(禹龍得) 씨는 서영무 감독의 제자들로 임신근 코치는 1967년부터 2년간 경북고에서 투수로서 감독과 함께 전국 고교 대회를 석권하며 이름을 날렸으며, 우용득 코치는 1966년 대구상고 포수로 고교 야구에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던 선수였다.

대구와 경북지역 선수 30명을 대상으로 엄격한 심사 끝에 선발된 선수는 투수 6명, 포수 3명, 내야수 7명, 외야수 6명 등 모두 22명이었다. 이들 속에는 국내 최고의 강속구를 자랑하는 왼손 투수 이선희(李善熙)를 비롯해 오른손 정통파 황규봉(黃圭奉), 권영호(權永浩) 및 포수 이만수(李萬洙)와 1루수 김한근(金漢根), 함학수(咸學洙), 2루수 배대웅(裵大雄), 3루수 천보성(千普成), 유격수 서정환(徐定煥), 오대석(吳大錫), 외야수 정현발(鄭鉉發) 등이 국가대표 출신으로 대학과 실업야구에서 이름을 날린 스타급 선수들이었다. 또 이들은 대부분 서영무 감독의 고교 제자들이기도 했다.

스타급 선수들이 많다는 것은 구단의 자랑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똑같은 대우를 해줄 수 없는 것이 걸림돌이 됐다. 프로야구 창단 운영계획에는 각 구단마다 등급별로 선수 수에 제한을 두고 있었다. 특급(계약금 2,000만원, 연봉 2,400만원)은 1명, A급(계약금 1,500만원, 연봉 1,800만원) 2명, B급(계약금 1,000만원, 연봉 1,200만원)은 4명, C급(계약금 750만원, 연봉 900만원) 약간 명에 D∼F급(계약금 500∼200만원, 연봉 600만원)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정해진 인원수 안에서 선발해야 하는 원칙이 있었다.

하지만 삼성은 D급 이하 선수들은 선발에서 제외했다. 프로선수다운 생활을 보장할 수 없어 특급을 제외한 A∼C급까지 3개 등급의 선수만 선발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다 보니 A급 선수가 6명으로 늘어나 팀 전체 급여액의 일정한 테두리(연간 5억1,000만원)에서 하향 평준화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선수 개인으로는 타 구단에 비해 다소 감액된 경우도 없지 않았다. 투수 황규봉, 이선희, 포수 이만수, 내야수 천보성, 배대웅, 외야수 정현발 등 6명이 A급 선수 대우를 받고 입단한 선수들이었다. 삼성은 프로야구 창단 작업이 본격화하자 야구단 대표인 단장에 이수빈 제일모직 사장을 내정한 뒤 그룹 산하 각 기업체에서 적임자를 차출해 프런트를 구성했다. 사무국 창설 요원 가운데 삼성농구단에서 주무를 맡았던 자연농원(현 에버랜드) 식물과장 김운룡(金雲龍)씨가 가장 먼저 12월 5일 사무차장으로 부임했고 이어 1982년 1월에는 제일모직에서 경리 담당으로 있던 김재하(金載夏) 씨가 합류했다. 이들은 야구단 창단 실무작업을 진행했던 그룹비서실 재무팀의 황백 과장과 민경춘 대리로부터 업무를 인계받고 본격적인 프로야구단의 프런트 업무를 시작했다. 2월에는 중앙일보 이규택(李揆澤) 사업부장이 사무국장으로 부임했고, 2월말에 배구선수 출신으로 제일제당에 근무하던 김종만(金鍾滿) 씨가 매니저로 합류해 선수들을 뒷바라지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에서 이용순(李鏞淳), 삼성전자에서 김상두(金相斗) 씨가 홍보담당으로 합류했다. 1982년 2월 3일은 삼성라이온즈의 모습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선포한 날이다. 삼성라이온즈는 이날 오후 5시 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에서 구단주 이건희 부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창단식을 갖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한국야구위원회 서종철 총재를 비롯한 각 구단 관계자와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창단식에서 이건희 구단주는 이수빈 단장에게 단기를 수여한 뒤 “삼성이 프로야구에 참여하게 된 가장 큰 뜻은 스포츠를 통해 꿈과 희망 그리고 활력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나아가 민족 화합과 국력 증강에 이바지하려는 데 있다”고 강조하고 “삼성라이온즈는 온 국민의 야구단, 페어플레이의 야구단, 꿈을 심는 야구단이 되자”고 당부했다. 이어 주장인 배대웅은 선수를 대표해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삼성라이온즈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선서를 했다.



창단식 이미지

창단식을 마친 선수단은 이튿날인 4일부터 10일까지 용인에 있는 삼성연수원에서 입문 교육을 받는 한편 삼성 계열 회사 견학을 했다. 이어 선수단은 2월 17일 오후 4시 40분 연고지인 대구에 도착, 동대구역에 마련된 대구시민환영대회에 참석해 2천여명의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이 자리에는 이건희 구단주 및 이수빈 단장을 비롯해 김성배(金聖培) 경북지사와 정채진(鄭採鎭) 대구시장이 참석해 삼성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좋은 경기를 보여줄 것을 당부했다. 오후 6시에는 금호호텔에 마련된 환영 리셉션에도 참석, 연고지 시민들과 우의를 다졌다. 이 행사에는 대구·경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각계 각층 250여명의 대표들이 함께해 삼성라이온즈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한편 삼성라이온즈를 제외한 프로야구 5개 구단은 1월 15일 OB베어스를 시작으로 MBC청룡(1월 26일), 해태타이거즈(1월 30일) 및 삼미슈퍼스타즈(2월 5일), 롯데자이언츠(2월 12일)가 차례로 창단식을 갖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3년 시한으로 대전 및 충남북지역을 연고지로 맡은 OB베어스는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南海) 호크스에서 투수로 활약한 천안북일고의 김영덕(金永德) 감독을 사령탑으로, 김성근(金星根·전 신일고 감독), 이광환(李廣煥·전 중앙고 감독)을 코치로 영입했다. 선수들은 투수 계형철(桂瀅鐵), 황태환(黃泰煥), 박상열(朴相悅), 박철순(朴哲淳), 김현홍(金賢洪), 강철원(姜哲元), 선우대영(鮮于大泳), 포수 조범현(曺凡鉉), 김경문(金卿文), 정종현(鄭宗鉉), 김진홍(金鎭弘), 내야수 이근식(李根植), 신경식(申慶植), 김광수(金光洙), 구천서(具千書), 양세종(楊世鍾), 박종호(朴鍾浩), 유지훤(柳志煊), 외야수 윤동균(尹東均), 이홍범(李洪範), 김유동(金裕東), 정혁진(鄭赫鎭), 이근식(李根植), 김우열(金宇烈), 구재서(具載書) 등이었다. MBC청룡은 일본 프로야구 긴데스(近鐵) 버펄로즈에서 은퇴한 백인천(白仁天)을 감독 겸 선수로 영입한 뒤 코치 이재환(李在煥·전 한양대 감독), 유백만(兪百萬·전 서울고 감독), 한동화(韓東和·전 충암고 감독)로 코칭스태프를 구성했다. 그리하여 투수 이길환(李吉煥), 이광권(李光權), 유종겸(柳鍾兼), 정순명(鄭淳明), 차준섭(車濬燮), 김시철(金時哲), 하기룡(河基龍), 박석채(朴錫埰), 포수 최정기(崔正基), 류승안(柳承安), 김용운(金容雲), 신언호(申彦皓), 내야수 김인식(金仁植), 김용달(金龍達), 정영기(鄭永基), 김용윤(金容允), 박재천(朴在天), 조호(趙澔), 외야수 이종도(李鍾道), 송영운(宋榮雲), 김봉기(金奉起), 배수희(裵壽熙), 최정우(崔正雨) 등과 함께 1월 26일 창단식을 가졌다. 그러나 이광은(李光殷)은 군에 몸담고 있어 그해 5월 팀에 합류했고 김재박(金在博)은 제27회 서울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할 국가대표 선수로 묶여 대회가 끝난 9월에야 뒤늦게 입단했다.

해태타이거즈는 선수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해태는 프로야구에 합류하면서 일찌감치 점찍었던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金東燁)을 감독으로 영입하는 데 성공, 코치로 유남호(柳南鎬·전 롯데 주무), 조창수(趙昌秀·전 광주일고 감독)를 선임했으나 선수가 부족한 가운데 1월 30일 창단식을 치렀다. 창단식에 참석한 선수들은 모두 14명으로 투수 김용남(金勇男), 강만식(姜晩植), 이상윤(李相潤), 신태중(申泰中), 포수 박전섭(朴田燮), 김용만(金容晩), 내야수 김봉연(金奉淵), 차영화(車榮華), 김성한(金城漢), 최영조(崔榮祖), 외야수 김준환(金準桓), 김우근(金宇根), 김종모(金鍾模), 김종윤(金鍾潤) 등이었다.

창단식이 끝난 뒤 투수 방수원(房水源)을 비롯해 외야수 김일권(金一權) 및 포수 김경훈(金炅勛), 홍순만(洪淳萬), 내야수 조충열(趙忠烈), 임정면(林禎勉) 등이 합류했지만 이들은 입단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투수 방수원(房水源)은 영남대에 재학 중이어서 프로에 입단할 수 없는 처지였고 외야수 김일권(金一權)은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1982년 9월 서울)에 출전할 국가대표 선수로 묶여 있어 입단이 불가능했다.



◎ 삼성 라이온즈 창단 멤버 ◎
위치 이름(한문·나이) 출신고 전 소속 경력
감독 서영무(48) 경복고 중앙대 감독
코치 임신근(33)
우용득(32)
경북고)
대구상
한일은행)
한일은행
감독)
코치
투수 황규봉(29)
이선희(27)
권영호(28)
성낙수(25)
송진호(25)
박영진(24)
경북고
경북고
대건고
경북고
대구상
대구상
한국화장품
포항제철
육군경리단
포항제철
포항제철
성균관대
국가대표
국가대표
국가대표
실업대표
대학대표
대학대표
포수 이만수(25)
손상득(28)
손상대(28)
대구상
경북고
경북고
한양대
포항제철
롯데

국가대표
국가대표
내야수 김한근(27)
배대웅(28)
함학수(27)
서정환(27)
오대석(24)
박정환(25)
천보성(29)
대구상
경북고
경북고
경북고
대구상
경북고
경북고
롯데
포항제철
포항제철
포항제철
한양대
포항제철
롯데(은퇴)
대학대표
국가대표
국가대표
국가대표
국가대표
대학대표
국가대표
외야수 전현발(29)
정구왕(29)
박찬(27)
허규옥(26)
김휘욱(26)
장태수(25)
경북고
경북고
경북고
대건고
경북고
대건고
롯데
한국화장품
농협(은퇴)
롯데
한국화장품
상업은행
국가대표
대학대표



대학대표

그러나 해태는 선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영남대를 자퇴한 방수원을 받아들였고 대한야구협회와 끈질긴 막후 협상 끝에 영입에 성공했다. 포수 김경훈(金炅勛)은 광주가 고향이었지만 신일고 출신이어서 연고지에 묶여 서울 연고 구단의 양해를 받아야 했다. 그런 점에서는 대전이 연고지인 홍순만(洪淳萬)은 물론 선린상고 출신으로 서울이 연고지인 조충열(趙忠烈), 마상상고 출신인 임정면(林禎勉)도 마찬가지였다. 2월 5일 인천상공회의소 강당에서 창단식을 가진 삼미슈퍼스타즈는 제일은행 감독을 역임한 박현식(朴賢植)을 사령탑으로 영입한 뒤 인천 토박이들인 이선덕(李善德·전 농협 감독), 이춘근(李春根·전 동산고 감독)을 코치로 선임했으나 뚜렷하게 내세울 선수가 없는 게 흠이었다. 투수 인호봉(印浩鳳), 이동주(李東周), 박경호(朴敬浩),김동철(金東喆), 이하룡(李夏龍), 한상연(韓尙演), 김재현(金在峴), 감사용(甘四用), 포수 최영환(崔榮桓), 김진철(金鎭喆), 금광옥(琴光玉), 내야수 김구길(金邱吉), 김경남(金慶男), 이철성(李哲聖), 송경섭(宋慶燮), 조흥운(趙興雲), 장정기(張貞起), 허운(許云), 이찬선(李燦瑄), 한인철(韓仁哲), 김무관(金武寬), 외야수 양승관(梁承琯), 문주모(文柱模), 김호인(金浩仁), 이경수(李京洙) 등이었으며 시즌 중반 투수 오문현(吳文鉉), 외야수 박준영(朴俊英) 등이 전력 보강을 위해 입단했다. 롯데자이언츠는 박영길(朴永吉·전 롯데 감독) 감독을 사령탑으로 영입한 뒤 최주억(崔周億·전 장충고 감독), 김명성(金明成·전 한국전력 코치)을 코치로 선임하고 투수 최옥규(崔玉圭), 노상수(盧相守), 천창호(千昌浩), 김문희(金文熙), 김덕열(金德烈), 방기만(房基萬), 이진우(李振雨), 이윤섭(李潤燮), 포수 차동렬(車東烈), 최순하(崔淳河), 내야수 김정수(金貞洙), 김일환(金一煥), 김용철(金容哲), 이성득(李成得), 김용희(金用熙), 정학수(鄭學守), 권두조(權斗祚), 외야수 김성관(金成琯), 박용성(朴庸成), 엄태섭(嚴泰燮), 정문섭(鄭文燮), 김재상(金在相) 등을 선발하여 6개 구단 가운데 가장 늦은 2월 12일 롯데호텔에서 창단식을 가졌다.

프로야구 개막식 경품 아반떼 기념품 추첨행사
프로야구 개막
1982년 3월 27일은 한국야구의 새 장을 여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프로야구가 화려한 개막 쇼와 함께 뜻깊은 개막식을 갖고 정식으로 출범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개막 경기에는 삼성라이온즈와 MBC청룡이 참가했다. 프로야구 출범을 축하하는 개막 쇼는 낮 12시부터 1시간 동안 ‘그라운드 쇼’와 성암여상, 동두천여상의 혼성 고적대 및 국악예술고 학생들의 민속무용 등으로 화려하게 그라운드를 수놓아 동대문야구장에 입추의 여지 없이 꽉 들어찬 3만여명의 관중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았다. 개막식은 오후 1시 16분 MBC 차인태(車仁泰) 아나운서의 사회로 시작, 유창순(劉彰順) 국무총리와 서종철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및 이건희 구단주를 비롯한 6개 구단 구단주와 시모다(卞田武三) 일본 프로야구 커미셔너, 쇼리키(正力亨)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 나가시마(長嶋茂雄), 장훈(張勳) 등 일본 프로야구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롯데자이언츠를 선두로 MBC청룡, 삼미슈퍼스타즈, 삼성라이온즈, OB베어스,

해태타이거즈의 선수들이 가나다 순으로 구단기를 앞세우고 마스코트와 함께 입장하자 이용일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이 개회를 선언했고, 서종철 총재는 개회사를 통해 “프로야구는 앞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의식, 신선한 감각, 건강한 시민생활을 선사해 줄 것”이라고 말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어 최고령 선수이자 OB베어스의 주장인 윤동균 선수가 선수들을 대표해 ‘페어플레이’를 다짐하는 선서를 낭독했다. 또 이날의 주인공들인 6개 구단 140여명의 선수들은 사인 볼을 관중들에게 선사, 역사적인 프로야구 출범의 즐거움을 함께 나눴다.

프로야구 출범을 축하하는 개막 쇼는 낮 12시부터 1시간 동안 '그라운드 쇼'와 성암여상, 동두천여상의 혼성 고적대 및 국악예술고 학생들의 민속무용 등으로 화려하게 그라운드를 수놓아 동대문야구장에 입추의 여지없이 꽉 들어찬 3만여명의 관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개발전 출전 전수 및 전적

한편 한국야구위원회는 대망의 개막식을 앞둔 3월 26일 오후 6시 30분 신라호텔 2층 ‘다이너스티 홀’에서 각계 인사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화려한 전야제를 가졌다. 이 전야제에는 유창순 국무총리 및 서종철 커미셔너와 6개 구단 구단주들을 비롯해 일본 프로야구 시모다 커미셔너, 쇼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 오코소(大社義規) 일본 햄 구단주, 나가시마 등이 외빈으로 참석했다. 또한 프로야구 주인공들인 6개 구단 감독을 비롯한 코치 및 선수들 전원과 내빈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 프로야구 출범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실감 나게 했다. 한국 야구의 새 장을 연 프로야구 개막 경기는 오후 2시 30분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로 막이 올랐다. 전 대통령은 2시 24분 마운드에 올라 2∼3차례 와인드업한 뒤 스트라이크 존에 정확하게 던져 관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이 땅에 첫선을 보인 프로야구 개막경기는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찬 3만여 관중들과 TV를 시청한 많은 팬들에게 박진감 넘치는 프로야구의 진면목을 선사한 한 판이었다. 역사적인 프로야구 개막전에는 감독 서영무와 코치 임신근, 우용득 외에 천보성(3루수), 배대웅(2루수), 함학수(1루수), 이만수(포수), 송진호(좌익수), 허규옥(우익수), 장태수(대타겸 우익수), 김한근(지명타자), 서정환(유격수), 정구왕(중견수) 등이 출전했다.

삼성의 선공으로 막이 오른 프로야구 개막경기는 1회 초 함학수가 1루수 실책으로 출루하면서 기회를 잡았다. 이어 이만수가 이길환 투수로부터 2루타를 쳐내 한국 프로야구사에 첫 타점을 기록하며 선제점을 올린 뒤 자신도 상대 팀의 실책으로 홈에 들어와 2점을 먼저 뽑아 기세 좋게 내달았다. 삼성은 2회 초에서도 날카로운 공격을 펼쳐 볼넷 2개와 3루타를 포함한 안타 2개로 3점을 추가, 5 - 0으로 크게 앞서 나갔다. 그러나 MBC의 추격도 만만치 않았다. 2회 말 이종도의 우월 2루타와 정영기의 우전 안타로 1점을 만회한 뒤 4회 말에는 볼넷으로 출루한 류승안이 이종도의 내야 땅볼로 홈을 밟아 2 - 5로 따라붙기도 했다.

하지만 삼성은 5회 초 이만수가 날린 프로야구 사상 첫 홈런에 힘입어 1점을 추가, 6 - 2로 멀리 달아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6회 말 3 - 7로 앞선 상태에서 백인천에게 허용한 좌중월 솔로 홈런이 승패의 분수령이 될 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7회 말 황규봉이 2명의 타자를 손쉽게 잡아낼 때만 해도 승리의 여신은 삼성 쪽에 있었다. MBC 2번 타자 송영운에게 좌전 안타를 허용한 뒤 3번 김용달에겐 우전 안타를 내주면서 위기를 자초한 게 화근이 됐다. 류승안에게 3점 홈런을 얻어맞아 7 - 7 동점이 된 것이다. 순식간에 동점을 허용한 삼성은 마운드를 황규봉에서 이선희로 교체, 급한 불을 끈 뒤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3회부터 등판한 MBC의 구원투수 류종겸의 볼 앞에 삼성 타자들은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2이닝을 3자 범퇴로 물러나 10회 연장전을 펼치게 됐다. 운명의 10회 말. 2이닝을 무실점으로 호투한 이선희는 김인식을 사구(死球)로 내보낸 뒤 김용달에겐 2루타를 허용, 1사 2, 3루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류승안이 어정쩡한 타구를 날리는 바람에 김인식이 홈에서 태그 아웃이 되어 한숨을 돌렸다. 2사 주자 1, 3루여서 한 명만 잡으면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타자는 백전노장 백인천이었다. 이선희는 정면 승부 대신 서영무 감독의 지시대로 백인천을 볼넷으로 걸러 보낸 뒤 이종도와 승부를 겨루는 만루작전을 폈다. 그러나 다음 타자 이종도의 만루 홈런으로 개막전은 끝이 났다. 승부는 MBC의 승리로 끝났지만 삼성 선수들은 회한을 남기지 않았다. 한국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유감없이 치른 한판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연장까지 가는 명승부는 프로야구 열기에 불을 지른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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