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로 부터 사랑받는 팀, 근성있고 호쾌한 야구를 하는 팀!
1982년 11월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코치로 활약한 재일동포 이충남(사진 오른쪽)을 조감독으로 영입, 서영무 감독을 보좌토록 했다. 사진은 1983년 후쿠야마 전지훈련장에서 일본 기자와 인터뷰하는 서영무 감독, 이충남 코치.
삼성라이온즈가 명문 구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이건희 구단주의 아낌없는 투자와 야구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21년간 삼성라이온즈에 몸담았던 구단주대행 및 사장들은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과 지역 개발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11명의 감독들은 삼성의 정신을 받들어 명문 구단 육성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초대 대표이사로 부임한 제일모직 이수빈 사장은 초창기 야구 살림을 맡아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특히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의 현대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던 이수빈 사장은 전광판과 음향시설 및 관람석 의자를 설치하여 시민이 보다 편하게 야구를 관람할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7월 2일 지방구장으로는 최초로 야간 조명시설 공사를 완료, 7월 10일 대구 역사상 최초인 야간경기를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또한 팀을 전기리그에서 29승11패로 준우승시킨 뒤 후기리그에서는 28승12패로 우승시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OB에 1승1무4패로 패해 원년 우승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이 사장은 코리언시리즈가 끝난 직후 미국 프로야구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팀을 초청(10월 16∼27일), 친선경기로 잠실 6게임, 대구에서 잠실 6게임, 대구에서
2게임을 치러 메이저리그의 수준 높은 경기를 팬들에게 선보이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한국시리즈 패배는 구단과 팀에 인사 태풍을 몰고 왔다. 11월 투수 코치 임신근이 사퇴하고 김호중(金昊中·한국화장품 감독)이 코치로 부임했으며, 이어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南海) 호크스와 한큐(阪急) 브레이브스에서 코치로 활약한 재일동포 이충남(李忠男)을 조감독으로 영입, 서영무 감독을 보좌토록 했다. 이는 걸음마 단계인 국내 프로야구에 선진야구를 접목시켜 질적 향상을 이루려는 이건희 구단주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이충남 조감독은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알아주는 수비 코치였다. 특히 작전과 주루에 일가견을 갖고 있어 선수들은 물론 코치들에게 선진기술을 가르쳐 주어 선수단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이충남 조감독의 영입과 함께 구단 실무를 담당했던 김동영 이사가 물러나고 김삼용(金三用) 씨가 이사로 전격 발탁됐다. 김삼용 이사는 1957년 경남중학 시절 전국체전에서 중학 최초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투수로 1972년 농협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한 야구인 출신이었다. 1983년 2월 이수빈 사장은 일본 후쿠야마(福山)에서 24일간의 해외 전지훈련(2월 10일∼3월 13일)을 실시해 선수들에게 한 발 앞선 일본 프로야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어 3월 30일 대구 제일모직 구내에 실내훈련장인 승리관을 개관해 본격적인 전천후 훈련의 문을 열게 했다. 하지만 이 사장의 정성 어린 뒷받침에도 불구하고 팀의 성적은 하위권에 머물고 있었다. 중앙일보 이종기(李鍾基) 사장이 대표이사 사장으로 부임한 1983년 4월 27일 5승1무8패로 6위, 서영무 감독이 퇴진한 5월 26일 12승1무17패로 5위였다. 이충남 조감독이 감독을 맡아 2연승으로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전기리그에서 5위(21승3무26패)로 처져 김삼용 이사의 퇴진을 몰고 왔다. 후임으로 중앙일보 노진호(盧鎭浩) 편집부국장 겸 체육부장이 이사로 부임했지만 후기리그 2위(25승1무24패), 종합 4위(46승50패4무)에 그쳤다.
신인으로 ‘타격의 천재’ 장효조(張孝祚)와 국가대표 에이스 김시진(金始眞)이 입단하여 전력이 강화됐지만 기둥 투수들인 이선희, 황규봉, 권영호의 부진이 원인이었다. 이들은 1982년 시즌에 각각 15승씩 45승을 올린 투수들이었다. 그러나 1983년 시즌에서 황규봉(6승), 권영호(6승), 이선희(5승)가 올린 승수는 김시진이 혼자서 거둔 17승과 같았다. 이종기 사장은 시즌이 끝나자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코칭스태프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실무를 담당한 노진호 이사는 10월 26일 이충남 조감독을 퇴진시킨 뒤 10월 27일 OB베어스 창단 감독으로 원년 우승을 달성한 김영덕을 제3대 감독으로 영입했다. 수석 코치로 대구 토박이 정동진, 타격 코치는 롯데 창단 감독인 박영길, 투수코치에 상업은행 감독을 역임한 뒤 MBC청룡에서 투수코치로 활동한 유백만, 2군 코치로 경운중 감독인 박창룡(朴昌龍)을 스카우트했다. 이로써 우용득(배터리 코치)을 포함, 5명의 코치가 김영덕 감독을 보좌하게 됐다. 이들은 이름이나 능력에서도 당대 최고의 코치로 손꼽혔다
1984년 시즌을 앞둔 삼성라이온즈는 코칭스태프뿐만 아니라 전력에서도 최고를 자랑했다. 감독 김영덕을 정점으로 당대 최고의 고수들인 정동진, 박영길, 유백만, 우용득이 코치를 맡고 있었다. 선수들 또한 기라성 같은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어 가히 천하무적이었다. 특히 재일동포 투·포수들인 김일융(金日融)과 송일수(宋一秀)의 영입은 팀전력에 큰 보탬이 됐다. 이를 입증하듯 6월 19일 끝난 전기리그에서 32승18패(승률 0.640)로 우승을 차지해 2년만에 한국시리즈 진출 티켓을 일찌감치 확보하는 경사를 맞았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후기리그까지 제패, ‘통합 우승’을 차지해 한국시리즈를 무산시킨다는 야망을 불태웠다. 이를 위해 김 감독은 ‘후기리그 우승을 위한 필승 전략’(별지 참조)을 수립하기도 했다. 이 10가지 필승 전략은 후기리그로 접어들면서 김영덕 감독이 직접 작성, 코치들이 숙지하도록 했다. 그만큼 김 감독은 전·후기리그 제패를 열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기리그 중반, 우승권에서 벗어나자 김영덕 감독이 한국시리즈 파트너 선택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바람에 필승전략은 빛을 잃었다. 후기리그 우승이 불가능해지자 김영덕 감독은 코치들과 한국시리즈에 대비한 전략회의를 가졌다. 가능한 한 상대적으로 삼성에 약한 팀이 후기리그에서 우승해 한국시리즈에서 만나게 하자는 의도에서였다.
코치들의 의견은 첫 번째 팀으로 해태, 두 번째 팀으로는 OB에게 모아졌다. 두 팀 모두 확실한 에이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영덕 감독은 롯데를 한국시리즈 상대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특급투수인 최동원이 버티고 있었지만 전·후기리그에서 ‘웨이팅 시스템’을 펼쳐 최동원을 여러 차례 녹 아웃시킨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시리즈에서도 ‘웨이팅 시스템’을 펼칠 경우 손쉽게 최동원을 무너뜨려 승산이 있다고 내다본 것이다. ‘웨이팅 시스템’이란 투수로 하여금 볼을 많이 던지게 하여 지치게 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최동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영길 코치의 생각은 달랐다. 최동원은 완투가 가능한 투수인데다 페이스를 조절할 경우 감당할 수 없다고 내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김영덕 감독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한국시리즈 파트너는 우여곡절 끝에 김영덕 감독의 뜻에 따라 롯데로 결정됐다. 그러나 한국시리즈는 김영덕 감독의 의도대로 풀려주질 않았다. 9월 30일 홈구장인 대구에서 벌어진 1차전부터 최동원의 호투에 밀려 0 - 4로 완봉패를 당했다. 2차전(10월 1일 대구)은 김일융이 완투한 가운데 8 - 2로 롯데를 꺾었지만 부산으로 옮겨 자웅을 겨룬 3차전(10월 3일)은 김시진과 권영호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최동원에게 다시 덜미를 잡혀 2 - 3으로 패했다. 하지만 삼성은 4차전(10월 4일 부산)에 김일융을 투입, 롯데 마운드를 난타한 끝에 완봉승(7 - 0)을 올려 2승2패로 잠실에서 결판을 내게 됐다. 서울로 옮겨 치른 5차전(10월 6일 잠실)에 롯데는 최동원을 투입한 반면 삼성은 권영호를 내세워 승부를 걸었다. 선제점은 롯데가 먼저 올렸다. 그러나 삼성은 2 - 2 동점이던 7회 말 정현발의 홈런으로 승리를 챙겨 3승2패로 우승을 넘보게 됐다. 하지만 롯데는 6차전(10월 7일 잠실)에 임호균을 선발로 내세워 4회 말 3점을 뽑자 최동원을 투입, 6 - 1로 승리를 챙긴 뒤 7차전(10월 9일 잠실)에서도 최동원을 선발로 내세우는 강공작전으로 나왔다.
하루를 쉰 최동원은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비해 이틀을 쉰 김일융은 힘이 넘쳐 흘렀다. 경기의 흐름도 삼성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4 - 3으로 리드하던 8회 초 김일융은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1사 후 김용희, 김용철에게 연속 안타를 허용한 뒤 유두열에게 홈런을 얻어맞아 3점을 헌납한 것이다. 순식간에 2점 차로 벌어지자 김영덕 감독은 황규봉을 소방수로 투입해 최동원을 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결국 2번째 출전한 한국시리즈에서도 준우승에 머물며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만 했다. 1985년은 삼성이 한국 프로야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해였다. 1984년 한국시리즈 패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막강한 전력을 바탕으로 전·후기리그를 모두 제패,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구분 | 내용 | 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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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홈구장 필승 작전 | 홈구장 경기에 김시진, 김일융, 황규봉 등 에이스를 투입, 절대 패하지 않는다. |
2 | 투수진 풀 가동 | 투수 16명 가운데 타 팀에 비해 손색이 없는 양일환, 전용권, 권기홍, 진동한 등 신예급을 총망라해 스펙타클한 투수진의 위용을 과시한다. |
3 | 개인기록 관리 | 이만수의 뒤를 이어 타격 2위인 박승호의 경우처럼 타율 3할 4푼대를 치고도 규정 타석 미달로 순위에 들지 못한 선수들은 후기리그에 풀 가동시킨다. |
4 | 컴퓨터 적극 활용 | 데이터 축적이 전기리그보다 풍부해졌으므로 상대팀 전력 분석에 철저를 기한다. |
5 | 심리적 안정 | 전기리그 우승으로 일단 목표는 성취했으므로 팀 분위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7월 2일부터 합숙에 들어가 안정된 바탕 위에 새 전력을 진작시킨다. |
6 | 장타 위주 공격력 개발 |
전기리그처럼 조심스럽고 아기자기한 야구를 버리고 이만수, 장효조, 정현발, 박승호 등 강타자들의 특성을 살려 통쾌한 야구를 구상한다. |
7 | 기동력 강화 | 도루가 별로 없었던 전기리그를 감안, 후기리그에는 강타와 도루가 연결될 수 있는 기동성을 높인다. |
8 | 철저한 전력 관리 | 타 팀에 비해 부상자가 전무한 실정(배대웅만 제외)이므로 이점을 최대로 활용, 팀 전력의 극대화를 꾀한다. |
9 | OB,해태의 참패 원인 분석 |
프로야구 원년에 우승한 OB와 1983년 우승한 해태의 페인을 분석, 귀감으로 삼는다. |
10 | 무리는 절대 금물 | 1985년 막강한 타선을 구축할 예정이라 투수진을 훈련시킨다는 기분으로 후기리그에 임하지만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 |
실로 놀라운 힘이었다. 1985시즌 전기리그에서 11연승(4월 12일∼27일)으로 기세를 올린 삼성은 4월에 14승1무5패, 5월에는 16승5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 뒤 6월 12일 대구에서 롯데를 15 - 3으로 물리쳐 3경기를 남겨 놓고 37승1무14패로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은 종합 승률을 의식, OB와의 3연전을 모조리 승리로 이끌어 40승1무14패에 승률 0.741이라는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별 최고 승률로 전기리그를 마감했다. 후기리그는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롯데가 상승 기류를 타고 있었다. 롯데는 7월말 15승5패로 12승9패에 머문 삼성을 2위로 밀치고 선두를 달렸다. 그러나 삼성은 8월초 부산과 대구를 오가며 치른 롯데와의 5연전(8월 6일∼12일)을 승리로 이끌면서 후기리그 우승까지 독점해 한국시리즈 없이 정상에 올라 통합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롯데가 부산, 대구경기 5연패를 포함, 8연패의 늪에 빠져 있는 동안 삼성은 연승 가도를 달려 9월 17일 부산 구덕구장에서 롯데를 7 - 4로 꺾고 13연승을 기록하며 후기리그까지 37승18패(승률 0.673)로 석권,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을 기록한 최초의 팀이 됐다. 하지만 우승의 기쁨도 잠시였다.
후기리그 2위로 우승을 놓친 롯데가 구덕구장의 불을 모조리 끄는 지능적인 우승 행사 방해로 후기리그 우승 시상식을 끝내 거행하지 못한 채 감독과 코치들을 헹가래치는 것으로 만족한 채 숙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후기리그 우승 및 페넌트레이스 우승 시상식은 9월 30일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오후 6시에 벌어졌다. 삼성은 이날을 ‘팬 감사의 날’로 정해 오후 1시 30분부터 몰려든 많은 관중들에게 우승 기념 라이터 1만4,000개와 응원가가 담긴 테이프 6,000개 및 어린이용 점퍼 4,000벌을 나눠 주었다. 또한 시상식에 앞서 멀리 던지기, 멀리 때리기 등 팬 서비스 행사를 가진 뒤 자체 청백전을 열어 그 동안의 성원에 보답했다. 이날 우승행사에 참석한 이건희 구단주는 한국야구위원회 서종철 총재와 이상연 대구시장 등 내외 귀빈들과 함께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수들을 격려했고 선수들은 구단주를 헹가래쳐 그 동안의 지원과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삼성은 전·후기리그를 제패하고도 최우수선수를 배출하지 못하는 가슴앓이를 했다. 삼성은 수위타자 장효조, 홈런 및 타점왕 이만수, 다승투수 김시진·김일융, 구원투수 권영호를 배출했다. 최우수선수는 이들 가운데서 당연히 선출될 것으로 믿었다. 제1후보로 꼽혔던 김시진은 25승5패로 최다승에 승률 1위(0.833), 제2후보였던 장효조는 수위타자(0.373) 외에 출루율 1위(0.467), 제3후보인 이만수는 홈런(22)과 타점(87) 및 승리타점(13)에서 1위를 차지해 최우수선수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엉뚱하게 이만수와 홈런 공동 1위(22), 장타율 1위(0.575)에 오른 해태 김성한을 최우수선수로 뽑아 파문을 일으켰다. 최우수선수 후보를 3명이나 배출한 것도 탈이었다. 특정 선수를 내놓고 지지할 수 없었던 삼성은 3명의 후보 가운데 누군가가 최우수선수로 뽑힌다는 확신만을 믿고 기자단 투표를 지켜봤으나 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김성한이 단독후보로 나선 해태에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삼성이 프로야구 출범 4년 만에 ‘통합 우승’으로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이건희 구단주와 이종기 사장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희 구단주의 뜻을 받든 이종기 사장은 우승이라는 단기적인 목적을 떠나 명문구단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내 최초로 해외 전지훈련을 주선했었다. 1984년 11월 7일 정동진 코치와 11명의 선수를 일본 미야자키(宮崎)로 보내 긴데스(近鐵)와 17일간 추계 합동훈련(11월 7일∼28일)을 갖게 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 훈련은 선진야구의 기술 습득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지만 일본에서 실시한 첫 마무리훈련이기도 했다.
1985년 2월에는 국내 구단으로는 최초로 미국 전지훈련(2월 27일~3월 16일 플로리다 베로비치)을 성사시켜 미국의 선진야구를 폭넓게 익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진은 김시진과 LA 다저스 발렌수엘라 투수.
1985년 2월에는 국내 구단으로는 최초로 미국 전지훈련(2월 27일∼3월 16일 플로리다 베로비치)을 성사시켜 미국의 선진야구를 폭넓게 익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미국 전지훈련은 김영덕 감독을 비롯한 정동진, 박영길, 유백만, 우용득 코치 및 선수, 프런트 등 38명이 참가했다. 또한 현지에서 LA 다저스 알 캄파니스(타격), 모리 윌스(주루)와 레드 애덤즈(투수) 및 치코 페르난데스(수비), 레오 포사다(타격) 코치를 인스트럭터로 채용해 지금까지 배운 야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선진야구를 익힌 뒤 18일 만인 3월 16일 귀국길에 올랐다. 이 전지훈련을 통해 김일융은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의 주무기였던 포크 볼을 익혀왔고 김시진은 제구력을 다듬어 그 해에 각각 25승을 올림으로써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의 디딤돌이 됐다. 이건희 구단주의 야구 사랑은 ‘통합 우승’에 만족하지 않았다. 1986년 2월 1일 경산에 전용훈련장 건설을 지시, 1987년 6월 8일 완공함으로써 선수들이 마음놓고 훈련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이종기 사장은 코치 육성 차원에서 은퇴한 천보성(千普成)을 미국으로 보내 선진야구의 기술 전수에도 앞장을 섰다. 천보성은 2월 25일부터 구단 사상 최초로 LA 다저스 스프링캠프에 참가, 4월 15일까지 내야수비와 주루 부문의 중점적인 교육을 받고 귀국했다. 이는 선수들의 사기 진작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를 반영하듯 1986년 팀은 전기리그에서 프로야구 불멸의 기록인 16연승을 올리며 39승15패로 우승을 차지했으며 플레이오프전에서는 후기리그 우승 팀 OB를 3승2패로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1985년 삼성의 전·후기 통합 우승으로 한국시리즈가 없어지자 경기제도를 변경해 1986년부터 플레이오프전이 도입됐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은 전·후기리그 2위 팀 해태에게 1승4패로 패해 재계약에 실패했다. 이종기 사장은 지휘봉을 박영길 코치에게 맡겨 다음 시즌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의 과제를 풀어주길 기대했다. 1987년 박영길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전무후무한 팀 타율 3할을 달성하며 전·후기리그를 석권해 특유의 공격적 야구로 삼성의 이미지 쇄신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에서 플레이오프 승리 팀 해태에게 4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투수 싸움에서 해태에 밀린 탓이었다. 이종기 사장도 투수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청보 핀토스에 몸담고 있던 재일동포 투수 김기태(金基泰)를 트레이드해왔고 6월에는 일본에서 김성길(金誠吉)을 어렵게 스카우트해 마운드를 보강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운드의 불안은 1988년에도 계속됐다. 이를 반영하듯 전기리그에서 23승1무30패로 5위로 처져 특단의 조치를 예고했다. 후기리그에서 가까스로 33승1무20패로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전기리그 2위 빙그레이글스에게 3연패를 당해 한국시리즈 진출마저 좌절됐다.
1988년 12월 23일 심벌 마크와 로고를 변경했다.
1989년을 '재창단 및 도약의 해'로 정한 이종기 사장은 홈 팬들이 안락하게 야구를 관람할 수 있도록 스탠드를 증축하고 등받이 의자와 전광판을 전자식으로 교체 하는 등 시민운동장 야구장 개·보수 작업을 실시했다.
구단은 대규모 레포츠센터를 건립해 야구단의 적자를 해소하겠다는 방안을 내놨다. 이 사업은 구체적으로 실행되어 1993년 10월 20일 삼성레포츠센터를 준공 함으로써 그 결실을 보았다.
1988년 삼성은 우승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에서 패해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는 아픔을 겪었다. 1983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삼성은 1983년 종합 4위로 처진 이후 해마다 한국시리즈에 진출, 우승을 다퉈왔고 1985년에는 프로야구 사상 전무후무한 통합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워 한국시리즈를 무산시키기도 했다. 1988년 플레이오프의 패배는 구단 안팎으로 충격을 몰고 왔다. 끝내는 삼성 비서실에서 구단 사상 초유의 감사까지 실시했다. 삼성라이온즈를 명문구단으로 육성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 10월 27일부터 30일까지 4일간 구단 운영 전반에 걸쳐 실시된 감사에서 ‘분위기 쇄신 및 전력강화 방안’과 ‘장·단기 발전 방안’이 제시됐다.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박영길감독은 계약기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임기 1년을 남겨둔 채 선수단 관리담당 이사대우로 물러나고 정동진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됐다. 또한 삼성의 얼굴이기도 했던 김시진, 장효조 등이 체질개선과 전력 보강 차원에서 트레이드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룹 감사는 삼성라이온즈가 명문 구단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를 위해 12월 23일 심벌 마크와 로고도 변경했다. 대외적으로 보다 친근하고 용맹스런 사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1989년을 ‘재창단 및 도약의 해’로 정한 이종기 사장은 5년간 5백억원을 투자해 명문구단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는 청사진을 밝혔다. 그 중 하나가 스포츠·레저 종합 센터인 삼성레포츠센터의 건설이다. 서울 서초동 삼성체육관 자리에 대규모 레포츠센터를 건립해 야구단의 적자를 해소하겠다는 방안이었다.
이 사업은 구체적으로 실행되어 1993년 10월 20일 삼성레포츠센터를 준공함으로써 그 결실을 보았다. 삼성레포츠센터는 수영장과 볼링장, 골프연습장 등을 갖춘 대규모 레포츠센터로 지역 주민들과 유대를 공고히 하며 삼성라이온즈 부대사업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이와 더불어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 대구시와 협조를 통해 새로운 구장을 건설한다는 원대한 꿈까지 펼쳐 보였다. 이 밖에 많은 홈 팬들이 안락하게 야구를 관람할 수 있도록 스탠드를 증축하고 등받이 의자와 전광판을 전자식으로 교체하는 등 시민운동장 야구장 개·보수 작업을 실시했다. 경산훈련장에 선수 합숙소와 실내연습장의 건설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또한 해마다 선수 및 구단 직원을 해외에 파견, 새로운 야구 기법과 구단 운영의 노하우를 습득케 하여 미국의 LA 다저스나 일본의 세이부(西武) 라이온즈와 같은 명문 구단을 만들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지역 사회 야구 발전을 위해 사회인야구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어린이 야구교실 및 리틀야구단 운영과 초·중·고야구대회를 열어 대구·경북야구계의 화합과 꿈나무 육성에도 발벗고 나섰다.
특히 1989년 1월 11일 편송언 대표이사가 구단 최초의 전담사장으로 취임해 어린이 여름야구교실 및 리틀야구단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1992년에는 삼성기 타기 대구·경북지역 초등학교 야구대회를 창설했다. 1993년에는 초등학교대회를 초·중·고대회로 확대해 3월 22일부터 5일간 25개 학교가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최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994년부터 우승 팀을 일본에 파견, 친선경기를 통해 선진야구를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도 했다. 편송언 사장의 부임으로 전에 없이 활기를 되찾은 구단은 사무국을 대구로 이전하고, 서울에는 홍보의 중요성을 감안해 홍보 담당 직원만 상주시켰다. 사무국의 대구 이전은 경기 및 선수단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현장 중심의 지원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분야별 전문 시스템제를 도입해 신인 발굴과 2군 활성화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단일 시즌제가 채택된 1989년 시즌에서 어렵게 4위(56승2무50패)를 차지한 팀은 준플레이오프에 진출, 태평양돌핀스에 1승2패로 패하는 수모를 당했다.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는 또다시 팀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1990년 새해가 밝자 정동진 감독은 코칭스태프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 수석코치에 유백만, 타격코치 우용득, 투수코치 유영수(柳永洙)를 새로 영입한 뒤 권영호와 손상대를 은퇴시켜 코치로 기용했다. 또한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미국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산하 트리플A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한 마티 디메리트와 미국 세미 프로팀에서 코치로 활동한 김광웅(金光雄)을 2군 코치로 받아들였다.
코칭스태프의 구성을 완료한 정동진 감독은 선수들의 정신력 개조를 위한 극기훈련을 단행했다. 1월 6일부터 3박4일간 팔공산에서 하루 평균 16Km씩 총 64Km의 산행으로 기초체력과 협동심을 길렀다. 특히 마지막 날엔 야간산행으로 담력을 키운 뒤 서울 근교의 공수부대에 입소, 3박4일간 유격 및 담력훈련과 얼음 속에서 인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시험까지 가졌다. 선수들에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강도 높은 지옥훈련이었다. 그러나 1990시즌 페넌트레이스 성적도 66승2무52패로 4위를 차지했다. 극기훈련과 지옥훈련으로 쌓은 정신력을 발휘한 것은 포스트 시즌에서였다. 준플레이오프에서 3위 빙그레를 2연승으로 물리친 선수들은 플레이오프에 올라 해태까지 3연승으로 꺾어 3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하지만 페넌트레이스 1위 LG트윈스에게 4연패를 당해 정동진 감독은 지휘봉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1990년 11월 6일 편송언 사장은 투수진을 강화하기 위해 ‘투수 조련사’ 김성근(金星根) 감독을 영입했다. 편 사장이 김 감독에게 팀을 맡긴 것은 투수 육성과 근성 있는 야구를 펼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편 사장은 부임 2년 만에 중앙개발㈜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기고 1991년 1월 5일 안덕기(安德基) 사장이 부임했다. 편송언 사장은 재임 기간 중 시민운동장 야구장 개·보수 외에 경산훈련장에 선수들의 편의시설인 클럽 하우스를 신축하는 등 구장과 훈련장의 현대화에 남다른 신경을 썼다. 또 여름방학을 이용해 어린이 야구교실을 개최하고 리틀야구단을 발족시켜 꿈나무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사회인 야구대회를 개최, 대구·경북지역에 사회인 야구 붐을 조성하는 데도 앞장을 섰다. 안덕기 사장도 재임 1년을 채우지 못한 채 1991년 12월 16일 삼성엔지니어링 사장으로 떠나 김흥민(金興敏) 사장이 부임했다. 안 사장도 짧은 재임 기간 동안 선수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그 좋은 예가 11월 19일 착공한 선수 합숙소였다. 경산훈련장에 세워진 이 합숙소는 2층 콘크리트 건물로 1992년 9월 25일 ‘필승관’이라는 이름으로 완공을 보았다. 하지만 1990년 편송언 사장이 큰 기대를 걸고 영입한 김성근 감독은 1991년 70승1무55패로 3위를 차지, 준플레이오프에서 4위 롯데를 꺾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에 패해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됐다. 1992년에는 67승2무57패로 4위를 차지한 끝에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롯데에 패해 10월 4일 결국 김성근 감독은 삼성 유니폼을 벗었다. 김흥민 사장은 호쾌하고 패기 넘치는 공격야구 재현을 위해 1992년 10월 5일 우용득 코치를 감독에 임명했다.
근본적인 인프라 구축 없이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다는 판단 하에 80여억원을 투자, 경산훈련장의 시설을 최첨단화하여 1996년 3월 28일 동양 최대 야구의 요람 ‘삼성라이온즈 볼파크’를 탄생시켰다. 이는 장기적으로 선수들을 양성하겠다는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호쾌하고 화끈한 공격야구를 펼친 덕분에 1993년 대구구장은 사상 최다 관중인 53만9,102명을 동원했다. 이는 1만명 수용규모를 갖춘 지방구장이 최초로 입장관중 50만명을 돌파하는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또한 1995년에는 62만3,970명이라는 입장관중 신기록을 세우며 대구를 야구열풍으로 가득차게 했다.
삼성의 사령탑에 오른 우용득 감독은 1987년 박영길 감독시절 타격 코치로 팀 타율 3할이라는 공격 야구로 전·후기리그를 제패하는 데 앞장섰던 주인공이다.
1993년 우용득 감독의 공격적인 야구는 신인 양준혁(梁埈赫)이 먼저 불을 질렀다. 양준혁이 괴력을 발휘하며 장타력을 과시하자 김성래(金聲來)와 이종두(李鍾斗)까지 가세, 73승5무48패로 페넌트레이스 2위를 차지하며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하지만 마운드가 문제였다. 노장 성준(成埈) 및 김상엽(金相燁), 김태한(金泰漢)과 신인 박충식(朴充湜)을 이끌고 플레이오프전에서 LG를 3승2패로 물리쳤지만 해태와 자웅을 겨룬 한국시리즈에서는 고난을 면치 못했다. 김정수(金正洙)를 비롯해 조계현(趙啓顯)과 선동열(宣銅烈)이 마운드를 지킨 해태에 2승1무4패로 패해 3년 만에 찾아온 우승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호쾌하고 화끈한 공격야구를 펼친 덕분에 대구구장은 사상 최다 관중인 53만9,102명을 동원했다. 이는 1만명 수용규모를 갖춘 지방구장이 최초로 입장관중 50만명을 돌파하는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1994년에는 51만8,504명으로 2만여명이 줄었지만 1995년에는 62만3,970명이라는 입장관중 신기록을 세우며 대구를 야구열풍으로 가득차게 했다.
3년 연속 50만명을 상회하는 관중을 동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요인은 첫째가 야구에 대한 재미를 높인 점이었다. 둘째는 낙후된 구장 시설의 대대적인 개·보수였다. 삼성은 야구장을 관중이 보다 편하게 야구를 관람할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만들었다. 특히 1995시즌 개막을 앞두고 멀티컬러전광판을 설치, 야구장에서도 스크린을 통해 생동감 넘치는 경기 장면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라운드를 인조잔디로 교체하고 음향시설도 최신화하는 등 대대적인 시설 개·보수를 통해 팬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1994년과 1995년은 입장관중 유치에는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팀 성적은 그렇지 않았다. 1994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자 김흥민 사장에 이어 제6대 이광진 사장이 1994년 11월 1일 취임하였고, 1995년마저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되자 1995년 10월 7일에는 제8대 감독으로 백인천 감독이 부임했다. 이어 11월 22일에는 안덕기 사장이 구단주 대행으로 취임했다.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는 대대적인 개혁을 불러왔다. 선수단의 세대교체를 통해 팀 체질을 개선하고, 선수들이 훈련할 수 있는 여건을 개선하는 등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 그 일환으로 ‘카리스마’가 강한 백인천 감독을 영입했던 것이다. 정신력이 나약해진 선수들에게 패기와 근성을 심어주어 우승의 열쇠를 풀기 위해서였다.
이와 더불어 근본적인 인프라 구축 없이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다는 판단 하에 80여억원을 투자해 경산훈련장의 시설을 최첨단화하여 1996년 3월 28일 동양 최대 야구의 요람 ‘삼성라이온즈 볼파크’를 탄생시켰다. 이는 장기적으로 선수들을 양성하겠다는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그러나 백인천 감독 역시 첫해인 1996년에 54승5무64패로 5위에 머물며 또다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여 구단 경영층의 교체를 예고했다. 1996년 10월 23일 제7대 전수신 사장이 취임하였고, 배구선수 출신으로 초창기 팀 매니저를 거친 김종만(金鍾滿) 스카우트 팀장을 단장으로 발탁하였다. 의욕적으로 1997시즌을 맞이했으나 백 감독의 카리스마도 한국시리즈 우승의 관문을 열지는 못했다. 백감독은 특유의 공격야구를 부활시키며 1997년 시즌동안 중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그러나 뇌출혈이란 악재가 겹쳐 중도에서 감독직을 포기하고 조창수(趙昌秀)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4위(66승7무53패)로 4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경사를 맞았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LG에 2승3패로 무릎을 꿇고 4년 만의 한국시리즈 진출도 무산되었다. 1997년 11월 1일 백인천 감독의 사퇴로 공석이 된 감독에 서정환(徐定煥) 코치를 선임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서정환 감독은 프로야구 트레이드 1호로 해태에서 잔뼈가 굵은 라이온즈 창단 멤버였다. 감독 교체에 이어 투수력 보강을 위해 11월 10일 해태의 기둥 투수 조계현을 트레이드하여 새로 출범한 서정환 감독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신필렬 사장은 2000년 10월 30일 김응룡 감독을 계약기간 5년에 계약금 3억원, 연봉 2억원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영입했다. 이어 코칭스태프의 전면적인 개편을 단행하고 나약한 선수들의 정신력 개조 작업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에 승부수를 던졌다. 2002년 10월 17일 삼성의 2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후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는 김응룡 감독.
2002년 11월 10일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역대 최고의 명승부를 펼치며 LG를 10-9로 극적으로 누르고 우승한 삼성. 선수들이 기쁨에 겨워 춤을 추고 있다.
1998년은 한국 프로야구에 새로운 장을 연 해였다. 외국인 선수들이 국내 선수들과 기량을 겨룬 첫 해였기 때문이다. 외국인 선수 수입문제는 1996년 7월 4일 취임한 한국야구위원회 홍재형(洪在馨) 총재의 역점 사업으로 추진된 끝에 결실을 보아 1997년 11월 14일 미국 세인트 피터스버그 힐튼 호텔에서 사상 첫 트라이 아웃이 실시됐다. 삼성은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투수들 가운데서 호세 파라와 스콧 베이커를 영입하여 1998시즌을 맞이했다. 스콧 베이커가 15승을 거두고 호세 파라는 7승을 기록하며 서정환 감독은 감독 첫해인 1998년 페넌트레이스에서 66승2무58패로 2위를 차지해 2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러나 LG에 1승3패로 패해 또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의 관문을 뚫지 못했다. 1998년 시즌이 끝난 뒤 전수신 사장은 대대적인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11월 3일 한화에서 투수 노장진(盧長震)을 영입한 뒤 12월 14일에는 해태에 거포 양준혁을 내주고 특급 마무리 임창용(林昌勇)을 끌어들였다. 트레이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2월 25일 쌍방울의 거포 김기태(金杞泰)와 투수 김현욱(金玄旭)을 입단시켜 마운드를 높인 뒤 12월 30일 두산으로부터 김상진(金尙珍)을 넘겨 받아 투수 왕국을 건설했다. 1999년에는 기필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강한 집념과 의지를 불태운 것이다. 전수신 사장의 집념은 페넌트레이스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경기제도 변경에 따라 8개 구단이 양대 리그(드림, 매직)로 나뉘어 자웅을 겨룬 매직리그에서 서정환 감독은 73승2무57패로 1위를 차지했다.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오프에서 드림리그 2위 롯데를 물리쳐야만 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가혹하기만 했다. 롯데에 3승4패로 패해 우승의 한을 여전히 풀지 못했다. 연속적인 플레이오프에서의 패배는 결국 감독 교체로 이어져 서정환 감독에 이어 1999년 11월 11일 지휘봉을 제10대 김용희(金用熙) 감독에게 넘겼고, 전수신 사장도 1999년 12월 22일 한행수(韓行秀) 사장에게 구단을 인계했다. 그러나 한행수 사장은 2000년 7월 10일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하고, 신필렬(辛弼烈) 삼성서울병원 행정부원장이 제9대 사장으로 부임했다. 2000년 삼성은 새 천년 첫 우승을 위해 FA(자유계약선수)로 풀린 해태 투수 이강철(李强喆), LG의 대형 포수 김동수(金東洙)를 영입하고 메이저리그 타격왕 출신인 강타자 훌리오 프랑코를 스카우트하며 최강의 전력을 갖추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이에 김용희 감독도 페넌트레이스에서 69승5무59패로 드림리그 3위를 차지, 준플레이오프에서 매직리그 2위 롯데를 2승1패로 격파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러나 현대에 뼈아픈 4연패를 당하고 삼성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프로야구 출범 20년이란 세월이 흐르도록 삼성라이온즈는 1985년 통합 우승을 했을 뿐 한국시리즈에서 단 한 차례 우승을 엮어내지 못했다. 선수 보강은 더 이상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됐다. 선수들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정신력을 함양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김응룡(金應龍) 감독은 바로 이런 점에서 필요했다. 신필렬 사장은 2000년 10월 30일 김응룡 감독을 계약기간 5년에 계약금 3억원, 연봉 2억원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영입했다. 이어 코칭스태프의 전면적인 개편을 단행하고 나약한 선수들의 정신력 개조 작업으로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승부수를 던졌다.
김응룡 감독은 1982년 10월 18일 해태 감독에 취임,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1997년까지 9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특히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한국시리즈 패배를 모르는 감독이었다. 하지만 마운드의 열세는 김 감독에게도 부담이 됐다. 5월 7일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로 1996년 다승왕을 차지했던 발비노 갈베스를 스카우트, 마운드를 보강한 끝에 14년 만에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에 그쳐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 비록 우승을 거머쥐지는 못했으나 전력의 허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기회여서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한 시금석이 됐다. 하지만 삼성이 2002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평탄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2002년을 ‘우승의 해’로 정한 삼성은 시즌 초반부터 현명관(玄明官) 구단주와 신필렬 사장을 비롯한 구단 임·직원들이 선수단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특히 2002년 1월 15일 이건희 회장의 뒤를 이어 구단주가 된 현명관 구단주의 염원은 남달랐다. 2001년 3월 구단주 대행으로 야구단과
인연을 맺은 현 구단주는 첫 번째로 맞았던 2001 한국시리즈에서 패배의 쓴 잔을 들어 2002 시즌에 거는 기대는 그 누구보다 크기만 했다.
그러나 시즌 초반 삼성의 모습은 기대와는 어긋났다. 시즌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인 5월 1일에는 4위로 떨어지는 불안감까지 노출했다. 큰 기대를 모았던 김진웅과 배영수를 비롯해 외국인 투수 브론즈웰 패트릭이 부진의 늪에 빠진 데다 장거리 타선마저 침묵을 지킨 때문이었다. 이승엽과 함께 중심 타선을 형성, 막강한 파워를 기대했던 양준혁의 침묵과 용병 매트 루크의 어깨 부상이 결정적인 부진의 요인이었다. 응급 수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삼성 프런트가 기민한 대처 능력을 보여준 것은 이때였다. 5월 9일 루크를 대신해 멕시칸리그에서 데려온 특급 투수 나르시소 엘비라를 임창용과 함께 선발로 돌리는 한편 제 구실을 못한 김진웅 대신 노장진을 마무리로 돌리면서 기사회생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6월 8일 1위에 올라 위기를 벗어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6월 28일에서 7월 9일까지 7연패의 늪에 빠지며 3위로 추락, 한때 1위 기아와 7.5게임 차로 뒤처지기도 했다. 이때를 두고 전문가들은 “삼성의 한국시리즈 자력 진출은 물건너갔다”고 봤다. 하지만 삼성의 숨은 뚝심은 놀랄 만했다. 연패의 사슬을 끊으면서 제 페이스를 찾기 시작한 삼성은 9월 10일부터 10월 12일까지 15연승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1위를 내달렸고 부산아시안게임이 끝난 10월 14, 15일 기아전(대구)에서는 2승1패를 거둬 한국시리즈 자력 진출을 사실상 확정했다. 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로 47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최다 타점(126)의 기록까지 경신한 이승엽, 결정적인 순간마다 팀을 구하며 최단안타(172)를 기록한 마해영, 가장 믿음직한 에이스로 성장한 선발 임창용과 신애니콜 노장진 등이 수훈 선수들이었다. 특히 이승엽과 마해영의 활약은 삼성야구 21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한국시리즈에서도 여지없이 빛을 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6차전에서 보여준 투혼이었다. 9회 말에 터진 이승엽의 3점 동점 홈런과 마해영의 역전 홈런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홈런이 됐다.
우승을 차지한 선수들이 관중석을 향해 절하며 팬들의 변함없는 성원과 격려에 답례하고 있다.
2001년 12월 3일 KBO 제6차 이사회에서 서울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경우 승률 상위 팀 구장에서 1, 2차전, 하위 팀 구장에서 3, 4, 5차전을 치른 뒤 6, 7차전은 승률 상위 팀 구장으로 옮겨 치르는 것으로 경기방식을 변경했다. 이에 따라 삼성은 2002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홈구장에서 안을 수 있었다. 사진은 6차전 대구구장 관중석 풍경.
프로야구 출범 20년간 페넌트레이스 및 한국시리즈 진행 방식이 구단 간의 이해 득실로 6번 변경됐다. 원만한 경기 진행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으나 삼성라이온즈 입장에서 보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1982년 페넌트레이스는 6개 구단이 전·후기리그를 통해 팀당 80경기를 소화, 모두 240경기를 치러 전기와 후기리그에서 우승한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7전 4선승제로 챔피언을 가리도록 했다. 그러나 전·후기 우승 팀이 동일할 경우에는 한국시리즈를 거행하지 않기로 했다. 이 방식은 1984년까지 계속됐다. 변경된 것은 경기 수였다. 1983년부터 팀당 20경기씩 페넌트레이스 경기 수를 늘려 100경기를 소화, 모두 300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1984년 OB가 전·후기리그에서 2위를 차지하고도 종합 승률 1위에 올랐으나 한국시리즈 진출권이 전기리그 우승 팀 삼성과 후기리그 우 승 팀 롯데에게 주어지는 불합리성이 발견되자 1985년 종합 승률제로 바뀌었다. 즉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는 요건으로 ▲전·후기리그 종합 승률 1위 팀 ▲종합 승률 1위 팀이 전·후기 가운데 한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종합 2위 팀이 나머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할 경우 두 팀이 한국시리즈를 거행 ▲종합 승률 1위 팀과 전·후기 우승 팀이 각각 다를 경우 전·후기 우승 팀끼리 플레이오프를 치른 뒤 승리 팀이 종합 승률 1위 팀과 한국시리즈를 거행 ▲한 팀이 종합 승률 1위로 전·후기리그서 우승했을 경우 한국시리즈는 거행하지 않기로 했다. 이에 따라 삼성라이온즈는 경기 수가 330경기(팀 당 110경기)로 늘어난 1985년 페넌트레이스에서 승률 0.706으로 종합승률 1위를 차지하고 전·후기리그도 모두 제패해 프로야구 사상 전무후무한 ‘통합 우승’ 실현으로 한국시리즈를 무산시켰다. 이로 인해 1986년에는 프로야구 진흥을 위해 한국시리즈는 반드시 개최되어야 한다는 취지 아래 플레이오프 제도가 도입됐다.
신생 팀 빙그레이글스의 참여로 팀당 경기 수는 110경기에서 108경기로 줄었지만 전체 경기 수는 48경기가 늘어난 378경기를 치른 이 해 ▲전·후기리그 1·2위 팀에게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부여 ▲플레이오프 진출권 2개를 획득한 팀은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나머지 1개를 획득한 팀은 5전 3선승제로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 진출 ▲2개 팀이 전·후기리그에서 1·2위를 차지,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2개씩 획득했을 경우 두 팀이 한국시리즈 거행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획득한 팀이 각각 다를 경우 전기리그 1위와 후기리그 2위 팀, 후기리그 1위와 전기리그 2위 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러 한국시리즈 진출 팀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전·후기리그에서 2위를 차지한 해태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반면 전기리그 우승 팀 삼성과 후기리그 우승 팀 OB가 플레이오프를 치러 삼성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이 방식은 1988년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1989년 경기 수가 420경기(팀 당 120경기)로 늘면서 단일 시즌제로 바뀐 대신 준플레이오프가 도입됐다. ▲페넌트레이스 1위 팀은 한국시리즈에 직행 ▲페넌트레이스 3위 팀과 4위 팀이 3전 2선승제로 준플레이오프를 거행 ▲페넌트레이스 2위 팀은 준플레이오프 승리 팀과 5전 3선승제로 플레이오프를 거행 ▲플레이오프 승리 팀은 페넌트레이스 1위 팀과 한국시리즈를 거행해 우승의 향방을 가리도록 했다.
1991년 신생 팀 쌍방울레이더스가 합류하면서 각 팀당 경기 수는 126경기로 늘어나 8개 구단이 1998년까지 해마다 504경기를 소화해냈다. 그러나 1993년 플레이오프 방식을 ▲준플레이오프는 페넌트레이스 3위와 4위간의 승차가 3경기 이내일 경우에만 거행 ▲플레이오프는 준플레이오프 승리 팀과 페넌트레이스 2위 팀이 5전 3선승제로 거행하되 준플레이오프가 무산된 경우에는 7전 4선승제로 거행키로 수정했다.
1999년에는 프로야구 활성화 대책의 일환으로 양대 리그를 도입, 드림리그(현대, 두산, 해태, 롯데)와 매직리그(삼성, LG, 쌍방울, 한화)로 나누어 페넌트레이스를 운용했다. 경기 수는 동일 리그 팀간에 20차전, 타 리그 팀간에는 18차전 등 각 팀당 모두 132경기(전체 528경기)를 치르되 ▲어느 리그의 3위 팀 승률이 타 리그의 2위 팀보다 높거나 같을 경우 3전 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 거행 ▲플레이오프는 두 리그의 페넌트레이스 1·2위 팀끼리 크로스로 7전 4선승제로 거행 ▲한국시리즈는 플레이오프 승리 팀끼리 7전 4선승제로 거행키로 했다.
그러나 이 방식도 리그간 전력 불균형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2001년 단일 리그로 환원하여 한 팀당 133경기, 모두 532경기를 치르되 ▲페넌트레이스 승률 1위 팀은 한국시리즈 직행 ▲승률 3·4위 팀끼리 3전 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를 가져 승리한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 ▲승률 2위 팀은 준플레이오프 승리 팀과 5전 3선승제의 플레이오프를 거행 ▲플레이오프 승리 팀과 페넌트레이스 1위 팀이 7전 4선승제의 한국시리즈를 갖도록 했다.
이 제도에 따라 2001년 페넌트레이스에서 1위를 차지한 삼성은 한국시리즈에 직행했으나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친 두산에 2승4패로 잡혀 한국시리즈 우승을 놓쳤다. 홈 구장인 대구에서 1승1패를 한 삼성은 적지인 잠실에서 1승 3패를 당해 허망하게 패권을 넘겨준 것이다. 하지만 2002 한국시리즈는 그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국시리즈의 경기 방식은 승률 상위 팀의 홈 구장에서 1, 2차전을 치른 뒤 승률 하위 팀 구장에서 3, 4차전을 갖되 승부가 가려지지 않을 경우 서울로 이동해 잠실구장에서 5, 6, 7차전을 치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 방식은 지방 팀 간에는 공평한 방식이었을지 모르나 상대가 서울 팀일 경우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잠실에서 5번 경기를 치르게 됨으로써 지방 팀은 단연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신필렬 사장은 이런 모순을 정확히 지적, 2001년 12월 3일 제6차 이사회에서 경기 방식을 변경하는 데 성공했다. 즉 서울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경우에는 승률 상위 팀 구장에서 1, 2차전, 하위 팀 구장에서 3, 4, 5차전을 치른 뒤 6, 7차전은 승률 상위 팀 구장으로 옮겨 치르기로 의결해 삼성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새롭게 바뀐 제도로 인해 삼성은 2002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홈구장에서 안을 수 있었다. 선수들에게 한 경기라도 더 홈구장에서 뛸 수 있도록 한 신필렬 사장의 숨은 공이 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