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로 부터 사랑받는 팀, 근성있고 호쾌한 야구를 하는 팀!
1990년 2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트에서 투수코치로 활약한 마티 디메리트와 정식으로 계약,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메이저리그 출신 미국인 코치를 받아들였다.
삼성라이온즈는 프로야구의 선두주자답게 야구의 국제화에도 앞장을 섰다. 선진야구의 기법을 조기에 도입, 국내 프로야구를 정착시키기 위한 이건희 구단주의 숨은 뜻이 담겨 있었다. 프로야구가 갓 출범한 1982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감독을 역임한 나가시마를 초청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자문을 받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4월 20일부터 23일까지 불과 4일간의 방문이었지만 구단 운영의 노하우와 선수 관리 방법을 자문받아 훗날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한 5월에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배팅과 피칭의 달인으로 이름 난 아오다(타격)와 스기시다(투수)를 단기 인스트럭터로 기용, 선수들의 기본기와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8월에는 미국 프로야구의 홈런왕 행크 애런을 초청, 수준 높은 미국야구 도입의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부사장이기도 한 행크 애런의 내한은 10월에 있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팀과의 친선경기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행크 애런은 8일간 머무르며 메이저리그의 차원 높은 타격 기술을 선보였다.
삼성라이온즈를 명문구단으로 만들기 위한 이건희 구단주의 깊은 뜻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2년 10월 9일 방한한 LA 다저스의 피터 오말리 구단주와 만나 업무 협의를 가졌다. LA구단과 기술 제휴 관계를 유지하기로 한 것도 이때였다. 또한 10월 30일에는 일본 프로야구 한큐(阪急) 브레이브스에서 작전·주루 담당 코치로 활약한 재일동포 이충남(李忠男)을 조감독으로 영입, 1983 시즌 내야 수비와 주루 플레이에서 진일보한 형태를 선보이기도 했다. 1985년 2월에는 국내 구단으로는 최초로 미국 전지훈련을 단행, 엄청난 파급 효과를 몰고 왔다. 미국 전지훈련은 전·후기리그를 석권, 통합 우승을 일궈낸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우승보다 더 값진 것은 메이저리그의 기술 습득이었고 야구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미국 전지훈련을 계기로 국내 프로야구는 일본식 야구에서 탈피, 미국식 야구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때문이다.
미국의 선진야구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1986년이었다. 외환 사정 악화로 해외 전지훈련이 중단되자 삼성은 LA 다저스에서 코치 2명을 인스트럭터로 초빙, 메이저리그식 훈련 방법을 선보여 미국야구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메이저리그 출신 미국인 코치를 정식으로 계약한 것도 삼성이었다. 1990년 2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트에서 투수코치로 활약한 마티 디메리트와 정식으로 계약, 1년간 투수들을 상대로 투구 폼의 교정과 신무기로 이름난 패스트 볼을 전수받기도 했다.
1982년 10월 16일 행크 애런이 이끄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팀을 초청, 서울과 대구에서 8차전의 친선경기를 치름으로써 수준높은 미국 야구 도입의 계기를 만들었다.
국내 프로야구 발전과 저변 확대를 위해 이루어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초청경기는 하나의 사건이기도 했다.
프로야구가 갓 출범한 1982년만 해도 야구의 세계화는커녕 구단을 어떻게 운영하고 선수를 어떻게 관리할지,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훈련은 방법이 어떤 것인지도 몰라 우왕좌왕했다. 프로야구는 매일매일 벌어지는 경기가 전부였다. 그러나 삼성은 달랐다. 일찍부터 일본이나 미국의 야구 인사들을 초빙, 구단 운영의 노하우를 받아들였고 효율적인 훈련 방법을 전수받아 실행에 옮겼다. 또 프로야구를 매체로 한 마케팅에도 눈을 떠 1982년 미국 프로야구의 명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교류의 물꼬를 터 세계 속에 삼성라이온즈의 존재를 알렸다. 1985년에는 사상 최초로 실행한 미국 전지훈련을 계기로 LA 다저스와 우호관계를 맺어 인적 교류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선진야구 습득에 목말라하던 코치와 선수들에게 야구연수의 길을 터주었다. 선진야구 도입을 위한 해외 연수의 길을 프런트에게도 열어줘 구단의 운영을 선진화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1994년에는 대만 프로야구 준궈 베어스와 자매 결연, 유망주의 파견과 야구의 기술이전은 물론 구단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노하우를 전수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97년에는 일본 프로야구의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우호구단 협정을 체결, 인적 교류의 폭을 넓히고 가을철 마무리훈련과 스프링 캠프에서 합동훈련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1982년 10월 16일부터 27일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8차전의 친선경기를 치렀다.
1982년 10월 16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역사적인 한·미 프로야구 친선경기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OB베어스의 대결로 펼쳐졌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초청경기였다. 첫 경기의 결과는 3-3으로 끝났지만 파급 효과는 엄청났다.
국내 프로야구의 발전과 저변 확대를 위해 이루어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초청경기는 하나의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국내 프로야구는 갓 출범한 상태로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구단의 운영은 물론이고 선수의 관리나 관중 동원에 따른 프로그램이 없었다. 프로야구의 질과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외국 프로 팀과의 교류를 공감하면서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프로야구 활성화 차원에서 미국 프로야구의 명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접촉을 시작해 6월부터 본격적인 실무 협상에 들어가 홈런왕 행크 애런의 초청을 이끌어냈고 끝내는 브레이브스 팀을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미국 전지훈련을 위한 세부 계획까지 세웠다.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1982년 8월 26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마이너리그 선수관리 담당 부사장인 행크 애런이 내한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내한에 앞서 경기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이 기간중 행크 애런은 서울운동장 야구장을 찾아 경기를 앞둔 삼성-롯데 선수들에게 배팅 폼과 기술을 지도했으며 인천구장을 찾아 삼성-삼미 선수들에게 타격기술을 지도하기도 했다. 특히 대구를 찾은 8월 30∼31일 삼성 선수들을 상대로 하루 2시간씩 훈련 방법과 타격기술을 지도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행크 애런은 은퇴한 몸이었지만 인기만은 여전했다. 생애 통산 755개의 홈런을 날려 메이저리그 최다 홈런 기록을 수립한 뒤였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듯 8월 29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신세계백화점에서 가진 사인회에 어린이 2만여명이 몰려들기도 했다. 그러나 10월 16일부터 27일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벌어진 친선경기는 시즌이 끝난 직후인 데다 날씨마저 추워 흥행에는 실패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1차전에서 OB와 3-3으로 비긴 뒤 10월 17일 벌어진 MBC전에서 3-5로 역전패를 당하는 등 강한 이미지를 심어주지 못했다. 실제로 8차전(서울 6경기, 대구 2경기)을 치르는 동안 3승1무4패를 당했다. 삼성과는 3차전(대구 2, 서울 1경기)을 치러 2승1패의 전적을 남겼다.
1982년 8월 26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마이너리그 선수관리 담당 부사장인 행크 애런이 내한했다. 대구를 찾은 8월 30, 31일 삼성 선수들을 상대로 하루 2시간씩 훈련 방법과 타격기술을 지도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프로야구 활성화와 선진야구 도입을 위한 해외 구단과의 첫 교류는 1982년 4월 20일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나가시마 시게루(長嶋武雄) 전 감독을 초빙하면서였다. 구단운영과 선수관리 및 전 분야에 걸쳐 자문을 받은 이후 아오다와 스기시다가 내한,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협조 체제를 갖추게 됐다. 프로야구 초창기 일본은 야구 기술 전도의 전진기지 같은 구실을 했다. 미국 프로야구도 비슷했다. 1982년 10월 미국의 홈런왕 행크 애런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이끌고 내한, 친선경기로 본바닥 야구의 진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교류는 1985년 전지훈련을 위해 미국을 찾아갈 때까지 맥이 끊겼었다. 엄격히 말해 미국 프로야구와의 본격적인 교류는 LA 다저스 스프링 캠프인 베로비치에서 전지훈련을 가지면서부터였다. 이 기간 LA 다저스는 4명의 코치를 합류시켜 기술 전수에 열성을 보였다. 또 전지훈련이 끝난 뒤에는 야구연수를 원하는 천보성(千普成) 코치를 2개월간 스프링 캠프에 잔류시키기도 했다. 천보성 코치의 LA 다저스 잔류는 해외 연수의 시발점이 됐다. 특히 천 코치는 외환사용 규제로 해외 전지훈련이 금지됐던 1986년 2월 15일부터 4월 15일까지 LA 다저스 스프링 캠프에 합류, 내야 수비와 주루 플레이에 대해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다. 백년대계를 위한 구단의 인재 양성 계획이 본궤도에 오른 것이다.
1989년에는 양일환(梁日煥) 투수코치를 11월 10일부터 22일까지 일본 긴데스 추계훈련장에 파견했다. 양 코치는 이 기간 동안 트레이닝 코치의 역할과 훈련계획서 작성 방법 등을 익혀왔다. 뿐만 아니라 1990년에는 천보성 코치를 함학수(咸學洙) 코치와 함께 LA 다저스 스프링 캠프에 파견, 2월 14일부터 3월 31일까지 연수를 받도록 했다. 천 코치는 1985년과 1986년에 이은 3번째 연수로 내야 수비와 주루 플레이에 대한 완벽한 지도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그러나 천 코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91년 자비로 미국 야구연수 길에 올라 이듬해 말까지 LA 다저스에서 타격 이론은 물론 지도 방법까지 익히고 돌아왔다.
엄격히 말해 미국 프로야구와의 본격적인 교류는 LA다저스 스프링 캠프인 베로비치에서 전지훈련을 가지면서부터였다. 이 기간 LA 다저스는 4명의 코치를 합류시켜 기술 전수에 열성을 보였다.
현역 선수로는 경주고를 갓 졸업한 우완 정통파 투수 손영철(孫榮鐵)이 LA 다저스 야구연수의 혜택을 받았다. 1991년 연고지명선수로 입단한 손영철의 야구연수는 1991년 2월 27일 LA 다저스 피터 오말리 구단주의 방문으로 안덕기(安德基) 사장이 유망주 및 코치 파견을 이끌어냈다. 이에 따라 손영철은 4월 3일 LA 다저스 스프링 캠프에 합류, 6월 17일부터 8월 31일까지 마이너리그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뒤 귀국했다. 선진야구 기술 습득을 위한 LA 다저스 야구 연수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우용득(1992년 2월 21일∼3월 5일), 배대웅(1993년 2월 18일∼3월 14일) 코치가 메이저 팀의 스프링 캠프에 합류, 타격 및 수비에 대한 지도 방법을 익혔다. 배대웅 코치는 1987년 일본 긴데스 버팔로즈에서 20일간 연수를 받은 이후 두 번째였다. 특히 1993년에는 남종철 트레이너를 처음으로 미국에 파견, 11월 2일부터 23일까지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에서 선수들의 부상 방지 대책과 부상선수에 대한 응급처치와 치료 및 치료기법을 습득하게 하였다. 김동재(金東再) 수비코치도 1995년 4월 30일부터 9월 30일까지 LA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의 키시미 다저(싱글A) 팀에 합류, 5개월간 선수들과 생활을 같이 하며 경기에 출전하는 등 실전 경험을 쌓았다. 또한 서정환(徐定煥) 수비코치도 3개월간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에 합류, 내야 수비의 새로운 기법을 터득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야구교류로 유대를 지속해 온 요미우리 구단이 코치와 선수를 위해 문호를 개방한 것은 1995년 2월 7일부터 31일까지 서정환 코치와 투수 오봉옥(吳奉玉) 및 재일동포 투수 한명호(韓明浩), 포수 임채영(林菜永) 등이 처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1995년 5월에는 서정환 코치가 요미우리 2군에 합류, 3개월간 2군의 운영 실태와 경기 운영 및 수비 코치 방법에 대한 기법을 익힌 뒤 귀국했다. 1996년에는 권영호(權永浩) 투수코치를 요미우리 2군에 파견, 2월 1일부터 7월 14일까지 코치 수업을 쌓도록 했다. 이어 양일환(梁日煥) 코치와 투수 전병호(田炳浩), 최한경(崔韓慶) 및 포수 양용모(梁龍模) 등이 10월 31일부터 11월 15일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미야자키 가을 캠프에 합류해 마무리훈련을 받았다. 1995년부터 시작된 요미우리 구단과의 인적 교류는 우호구단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됐고 급기야는 1997년 자매 구단으로 우의를 다지게 됐다.
1982년 8월 26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마이너리그 선수관리 담당 부사장인 행크 애런이 내한했다. 대구를 찾은 8월 30, 31일 삼성 선수들을 상대로 하루 2시간씩 훈련 방법과 타격기술을 지도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해외 구단과의 자매 결연은 1994년 대만 프로야구 준궈 베어스가 처음이었다. 야구의 국제화 추세에 발맞춰 인적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1994년 1월 5일 김흥민(金興敏) 사장은 준궈 베어스의 진일평(陳一平) 구단주와 자매 결연을 맺기로 합의, 이제까지 기술을 전수(傳受)받던 자세에서 벗어나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준궈 베어스는 1993년 창단한 신생 팀으로 전력도 약할 뿐만 아니라 구단 운영과 선수관리에도 체계가 잡혀 있지 않은 상태였다. 준궈의 진 사장은 13년간 삼성이 쌓아온 노하우의 전수를 원했다. 또한 허약한 마운드의 보강을 위해 잠수함(언더 핸드) 투수 한희민(韓禧敏)의 트레이드까지 요청하고 있었다. 대만 프로야구에서는 잠수함 투수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는 한희민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어차피 코치의 길을 걸어야 할 입장이므로 연수 차원에서 트레이드는 쉽게 성사됐다. 준궈 베어스와의 교류는 한희민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신인 투수의 파견과 전지훈련 및 친선경기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선수 파견에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었다. 매년 신인 투수 1명을 파견하되 선수의 보호 차원에서 일주일에 1회 등판을 원칙으로 했다. 또한 활동 기간 내의 연봉과 숙식은 물론 연 2회 왕복 항공권을 준궈 베어스가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2월 8일 투수 감병훈(甘秉勳), 5월 14일에는 투수 김종국(金鍾國)을 파견, 실전 경험을 쌓게 했다. 또 1995년에는 자유계약선수로 은퇴한 외야수 박인구(朴仁球)를 보내 제2의 야구인생을 가꿀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1997년에는 일본 프로야구의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손을 잡았다.
4월 3일 전수신(全秀信) 사장과 요미우리 후카야 구단대표가 도쿄(東京) 아카사카(赤阪) 뉴 오오타니 호텔에서 만나 우호구단 협정을 체결했다. 야구 교류 16년 만에 이루어진 자매 구단 결연으로 일본 프로야구를 이끌고 있는 요미우리 구단의 선진 야구 기술과 구단운영의 노하우는 물론 인적 교류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1차전 (10월 16일 잠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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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 1 | 0 | 0 | 0 | 0 | 2 | 0 | 0 | 0 | 3 |
O B | 0 | 0 | 1 | 0 | 1 | 0 | 0 | 1 | 0 | 3 |
2차전 (10월 17일 잠실) | ||||||||||
애틀랜타 | 2 | 0 | 0 | 0 | 0 | 0 | 1 | 0 | 0 | 3 |
MBC | 0 | 0 | 2 | 1 | 0 | 0 | 0 | 2 | X | 5 |
3차전 (10월 20일 대구) | ||||||||||
애틀랜타 | 7 | 1 | 0 | 3 | 0 | 2 | 0 | 0 | 0 | 3 |
삼 성 | 0 | 1 | 0 | 0 | 2 | 0 | 0 | 1 | 1 | 5 |
4차전 (10월 21일 대구) | ||||||||||
애틀랜타 | 3 | 0 | 0 | 0 | 0 | 0 | 0 | 2 | 4 | 9 |
삼 성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5차전 (10월 23일 잠실) | ||||||||||
애틀랜타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한 국 | 0 | 0 | 0 | 1 | 0 | 0 | 0 | 0 | X | 1 |
6차전 (10월 24일 잠실) | ||||||||||
애틀랜타 | 0 | 0 | 2 | 3 | 0 | 1 | 2 | 1 | 1 | 10 |
한 국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7차전 (10월 26일 잠실) | ||||||||||
애틀랜타 | 0 | 0 | 0 | 1 | 0 | 0 | 2 | 0 | 0 | 3 |
한 국 | 0 | 0 | 1 | 0 | 1 | 1 | 0 | 0 | 1 | 4 |
8차전 (10월 27일 잠실) | ||||||||||
애틀랜타 | 0 | 0 | 0 | 1 | 0 | 1 | 0 | 0 | 0 | 2 |
삼 성 | 0 | 0 | 0 | 3 | 1 | 0 | 0 | 0 | X | 4 |
요미우리 구단과의 우호관계 협정 체결은 전수신 사장의 오랜 기간 물밑 접촉 끝에 얻어낸 쾌거였다. 보다 폭 넓은 야구교류를 위해 1월 말 요미우리 구단을 방문한 전수신 사장은 자매구단 결연을 제의, 3월 초 요미우리 측이 찬성하는 공문을 정식으로 보내 옴으로써 성사됐다. 이를 계기로 요미우리 구단과 야구 교류의 폭을 확대, 코치와 선수의 연수를 비롯해 가을철 마무리훈련과 스프링 캠프에서 합동훈련도 가능하게 됐다. 자매 결연 후 첫 번째 교류가 그 해 8월 25일부터 11월 23일까지 투수 감병훈, 박태순과 포수 장성국을 90일간 2군에 합류시켜 기량을 연마토록 한 일이었다. 또 1998년 2월 10일부터 22일까지 요미우리의 미야자키(宮崎) 캠프에서 합동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코치 2명을 비롯해 투수 및 포수 10명이 참가한 이 훈련에서 요미우리 투수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구질과 폼을 다듬었다. 또한 가을 마무리훈련(11월 1∼20일)에는 장호연 코치를 비롯, 투수 김진웅, 정현욱, 포수 황두성, 김지훈 등이 참가, 피칭 기술을 연마하며 과감한 피칭을 위한 마음의 자세를 익혔다. 2000년 3월 22일에는 우호구단 협정의 기간 만료로 요미우리 구단 사무실에서 한행수(韓行秀) 사장과 야마모토 사장이 만나 2003년까지 기간을 연장하는 새 협정을 체결했다. 새로 체결한 협정은 우호 증진을 위해 대화 창구를 설치하는 것을 비롯, 인적 교류를 통해 구단의 운영과 코치 및 선수의 기량과 자질을 향상시키는 데 협력키로 했다. 또한 외국인 선수 영입에 따른 각종 정보와 자료도 제공하기로 하는 등 6개 항목에 합의했다. 새 우호구단 협정에 따라 이루어진 훈련이 가을 마무리훈련으로 2000년 11월 6일부터 17일까지 마야자키 캠프에서 유망주들인 이용훈(李勇勛), 배영수(裵英洙), 이준호(李俊昊) 등이 요미우리 코치의 지도로 피칭훈련을 받았다.
후쿠야마 전지훈련지에서 일본인 코치가 장효조에게 타격 지도를 하고 있다.
1983년 2월 10일 서영무 감독을 비롯한 37명의 대식구가 후쿠야마시에서 15Km가량 떨어진 미루노사토에 훈련캠프를 차렸다.
1983년 첫 실시된 후쿠야마 전지훈련
국내 프로야구의 일본 전지훈련은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을 택한 것은 야구 선진국일 뿐더러 날씨도 국내보다는 온화해 훈련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최적지로 꼽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로야구 출범 1년을 갓 지난 뒤여서 전지훈련에 따른 정확한 정보가 미약했다. “남쪽 나라니까 따뜻할 것이다. 프로야구도 우리보다 40여년 앞서 시작했으니까 기술 습득에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막연한 동경심이 크게 작용했다. 삼성도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삼성이 전지훈련지로 잡은 곳은 히로시마(廣島)와 이웃한 후쿠야마(福山)의 미루노사토에 있는 신쇼지(新勝寺)구장이었다. 기후가 한국보다는 온화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일본의 2월도 역시 추웠다. 날씨도 고르지 못했다. 느닷없이 눈이 내려 애를 먹였다. 서영무(徐永武) 감독을 비롯한 37명의 대식구가 미루노사토에 훈련캠프를 차린 것은 1983년 2월 10일이었다. 후쿠야마시에서 15km 가량 떨어진 한적한 야산 숲 속이었다. 그러나 훈련에 필요한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지지 않았다. 훈련 장소를 국내에서 일본으로 바꾸었다는 것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선수들은 의욕과 투지가 넘쳤다. 초반은 이충남(李忠男) 조감독의 훈련 프로그램에 따라 전술훈련과 팀워크를 다지는 데 힘을 쏟았고 후반에는 실전에 대비한 훈련으로 땀을 흘렸다. 특히 내야 수비와 주루 플레이가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 이충남 조감독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익힌 신기법을 도입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런 훈련은 국내에서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소득이 있었다면 일본 프로야구서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소득이 있었다면 일본 프로야구 팀들과 치른 친선경기였다. 3월 13일 전지훈련을 마무리할 때까지 난카이(南海) 호크스 등 4개 팀과 4차례에 걸친 친선경기에서 1승3패를 거두었지만 일본야구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하지만 1983 시즌에서는 일본 전지훈련의 보람도 없이 전기리그 5위(21승3무26패), 후기리그 2위(25승1무24패), 종합 4위(46승4무50패)라는 참혹한 성적을 냈다.
일본 후쿠야마에는 1984년 또 한번 찾아갔다. 1983년 10월 27일 성적부진으로 퇴진한 서영무-이충남 감독의 뒤를 이어 지휘봉을 잡은 김영덕(金永德) 감독의 인솔로 42명이 참가했다. 김 감독은 1963년까지 난카이 호크스 투수로 활약한 탓으로 일본 프로야구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큰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눈과 한파가 몰아쳐 이렇다 할 성과 없이 2주일 만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984년의 일본 전지훈련은 실패였다. 하지만 1984 시즌이 끝난 11월 정동진(丁東鎭) 코치와 11명의 선수들을 미야자키(宮崎)에 있는 휴가(日向)의 긴데스(近鐵) 추계훈련 캠프에 합류시켜 상당한 성과를 얻어냈다. 국내 팀으로는 처음으로 시도한 해외 마무리 훈련이었다. 긴데스 선수들과 합동으로 치른 이 훈련을 통해 정동진 코치는 일본 팀의 훈련 방법과 선수 관리 및 지휘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선수들 역시 훈련의 요령과 자기 관리 및 한발 앞선 기술을 체험으로 익히게 됐다.v 휴가에서 긴데스와 치른 마무리 합동 훈련의 성과는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1991년 11월 2일 다시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유망주들인 이태일(李太逸), 김상태(金相台), 최현준(崔賢俊)의 기량을 갈고 다듬기 위해 박용진(朴容震) 2군 감독과 함께 긴데스 추계훈련에 합류시켰다. 1990년 입단한 이태일은 데뷔 첫 해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13승6패(방어율 3.50)의 성적을 올려 수준급에 오른 투수였다. 이태일은 변화구를 다듬기 위해 합류를 했고 김상태와 최현준은 피칭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20일간 합동 훈련에 참가했다.
이런 류의 마무리 훈련은 1996년까지 3차례 걸쳐 실시됐다. 코치로는 권영호, 박승호(朴承昊), 투수는 오봉옥(吳奉玉), 김현욱(金玄旭), 김인철(金寅哲), 이상훈(李相勳), 포수로는 이영재(李永宰), 최형현(崔亨鉉)이 합류했다. 투수들은 변화구 개발과 약점 보완은 물론 투구 폼까지 교정을 받았다. 포수들은 포구와 송구 외에 타격훈련 등으로 땀을 흘렸다. 1988년 2월 15일에는 박영길(朴永吉) 감독의 인솔로 코칭스태프 8명과 선수 37명이 규슈(九州) 중동부 해안가에 위치한 노베오카(延崗)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1984년 후쿠야마 전지훈련 4년 만에 다시 일본을 찾았다. 노베오카는 인구 12만의 소도시였다. 연습장인 니시시나(西階) 구장은 8년 전까지 긴데스가 스프링 캠프로 사용하던 곳이어서 훈련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문제는 날씨였다. 2월의 평균 기온이 최저 영상 3도, 최고 영상 10도로 우리의 초봄 날씨와 비슷했다. 그러나 전지훈련 기간 동안 날씨가 고르지 못한 데다 기온까지 낮아 부상 선수가 속출하자 일정을 앞당겨 귀국했다. 노베오카 전지훈련은 1985년의 미국 전지훈련 이후 3년 만에 실시한 해외 전지훈련이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긴데스에서 투수 코치로 활약한 사나다(眞田)를 인스트럭터로 기용, 집중적인 훈련으로 성준(成埈)과 2년생 투수 장태수(張泰洙), 신인 투수 홍성연(洪性淵)의 기량이 몰라볼 정도로 향상된 점이었다. 1986년 데뷔한 성준은 첫 해 15승을 올려 김시진의 뒤를 이을 에이스로 각광을 받았다. 1987 시즌에는 방위 복무로 4승에 그쳤으나 1988 시즌에는 김시진과 나란히 11승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투수 역할을 했다. 또 신인 홍성연도 3승을 챙겨 주목을 받았다.
눈과 한파가 몰아쳐 이렇다 할 성과 없이 2주일 만에 철수했던 1984년 후쿠야마 전지훈련.
또 16명에 이르는 신인들의 대거 입단으로 흩어진 팀워크를 바로잡겠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전지훈련은 투수력 강화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투수는 무조건 변화구 1개를 다듬어 주무기로 활용케 하겠다는 것이 정 감독의 각오였다.
현지에서 고야마 마사하키(小山正明)와 곤도를 투수 인스트럭터로 기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들은 모두 일본 프로야구에서 알아주는 코치들이기도 했다. 고야마는 세이부(西武) 라이온스에서, 곤도는 긴데스에서 투수 코치를 역임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한신(阪神) 타이거스에서 선수생활을 한 고야마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320승을 올린 거물로 현역으로 활동하던 1964년 투수에게 주는 최고의 상인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인물이기도 했다.
노베오카 전지훈련에서 각광을 받은 신인 투수들은 김상엽(金相燁)과 류명선(柳明善)이었다. 고야마 코치로부터 15일간 집중적으로 피칭 훈련을 받은 김상엽은 유동적이던 투구 폼을 완전히 고정시켜 묵직하면서도 빠른 공을 흔들림 없이 던질 수 있게 됐다. 곤도 코치의 지도를 받은 류명선은 스피드의 완급 조절을 익히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특히 류명선은 긴데스와 가진 2차례의 연습경기에 마무리로 등판, 4와⅔이닝 동안 1안타만을 허용하는 호투로 긴데스 관계자들로부터 ‘일본에서도 10승을 올릴 수 있는 투수’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를 입증하듯 류명선은 1989 시즌 34경기에서 14승(8패)1세이브를 올려 재일동포 김성길과 함께 팀 최다승 투수가 됐다. 일본 전지훈련은 노베오카 캠프를 끝으로 한동안 찾지 않았다. 2월의 기온이 국내와 비슷해 투수들에게는 지옥훈련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미국이나 호주에서 충분한 훈련으로 기량을 연마한 뒤 귀국에 앞서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는 경유지로 각광을 받았다.
백인천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일본 전지훈련이 재개돼 1996년 국내 팀으로는 최초로 남쪽의 섬 오키나와를 찾았다. 사진 백인천 감독.
그러나 1996년 백인천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일본 전지훈련이 재개됐다. 그것도 국내 팀으로는 최초로 찾아간 남쪽의 섬 오키나와였다. 오키나와 전지훈련은 해외 전지훈련 사상 유례가 없던 1, 2군 전원(코치 15, 선수 52, 지원 12명)이 참가한 가운데 1, 2차로 나누어 63일 동안 실시됐다. 1차 훈련은 1월 18일 신인 및 젊은 선수들이 선발대로 오키나와에 도착, 헤이와노 모리구장에서 2월 15일까지 체력 단련을 위주로 한 기본 훈련을 마쳤다. 이어 2월 18일부터 3월 21일 귀국할 때까지 고자 시립구장에서 2차 훈련을 실시, 실전에 대비한 전술 훈련을 통해 기량을 연마했다. 또 실전 감각을 익히기 위해 자체 청백전 8차례, 일본 팀과의 연습경기 5차례를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고된 훈련에도 불구하고 1996 시즌 성적은 사상 최악인 6위(54승5무67)에 그쳐 충격을 안겼다. 에이스인 김상엽의 허리 부상과 김태한의 부진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백인천 감독의 재임시절 오키나와 전지훈련은 또 한 차례 이루어졌다. 1997년 2월 23일부터 3월 16일까지 20여일간 실시된 이 훈련은 1996년 호주 마무리훈련(12월 3∼24일)과 1997년 미국 전지훈련(1월 27일∼2월 19일)의 성과를 최종 점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호주 전지훈련까지 포함하면 장장 66일 간에 걸쳐 훈련을 치른 것이다. 전년도와는 달리 만족할 만한 소득을 챙겼다. 특히 무명이었던 신동주와 최익성의 변신이 놀라웠다. 1990년에 입단한 신동주는 1995 시즌부터 주전으로 발탁됐지만 상대 팀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1997 시즌 120경기에서 타율 0.326을 기록하며 2루타 37개와 홈런 21개를 날려 가공할 중·장거리 타자로 변신했다.
최익성은 1994년 테스트를 받은 끝에 입단한 연습선수였다. 1997 시즌부터 주전으로 발탁되어 122경기에서 2루타 25개, 홈런 22개를 날리며 타율 0.296을 기록, 무서운 새끼 사자로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 마운드에도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허리 부상으로 고생하던 김상엽이 재기에 성공, 12승6패를 올린 것을 비롯해 박충식(13승6패2세이브), 전병호(田炳浩·10승8패)가 제 몫 이상을 해냈다. 1996 시즌 극심한 부진으로 눈총을 받았던 마무리 투수 김태한이 8승7패23세이브를 올려 4년 만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값진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1998년 일본 전지훈련은 예정에 없었다. 미국 플로리다의 베로비치 다저타운에 전지훈련 캠프를 차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IMF사태로 국내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자 외환 절약을 위해 제주도에서 훈련을 하는 2월 10일부터 시작된 미야자키 훈련은 투수들을 위한 훈련이었다. 요미우리 캠프에서 실시한 이 훈련에는 코치 2명을 비롯해 투수 11명이 참가, 2월 22일까지 계속됐다. 오키나와 훈련은 2월 22일부터 야수 34명을 상대로 3월 13일까지 진행됐다. 감독 첫해를 맞는 서정환(徐定煥) 감독은 유격수 출신답게 내야 수비에 치중, 이승엽(1루)-정경배(2루)-김태균(유격)-김한수(3루)로 이어지는 철벽 수비망을 구축했다. 그렇다고 투수와 타자들의 기량 보강 훈련을 등한히 한 것은 아니었다. 김한수의 타력을 극대화시켜 양준혁-이승엽-김한수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를 정착시켰다. 신인 강동우(姜東佑)를 다듬어 과감하게 1번 타자로 기용, 성공한 것도 오키나와 전지훈련에서 얻은 소득이었다. 투수들 가운데는 지난 2년간 단 1승도 올리지 못했던 곽채진(郭採振)이 놀랍게 변신, 회오리 바람을 예고했다. 1994 시즌 2승2패로 선을 보였던 곽채진은 1998시즌에서 7승5패5세이브를 올리는 성과를 거뒀다. 또 1998년 가을에는 젊은 투수 양성을 위해 11월 1일부터 20일까지 20일간 미야자키의 요미우리 캠프에 합류시켜 선진기술 습득과 구질을 연마토록 하였다. 이 캠프에는 장호연 코치를 비롯해 투수 김진웅, 정현욱 및 포수 김지훈, 황두성이 참가했다. 1999년 가을에는 호주에서 해오던 마무리훈련을 사이판 팔라시오 구장으로 옮겨 11월 30일부터 12월 29일까지 실시했다. 지난 1996년부터 3년간 연례행사처럼 찾아갔던 호주 대신 사이판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팔라시오 구장은 긴데스의 전용 훈련장으로 시설이나 숙식에 따른 여건이 좋았다. 기온이 높은 게 흠이지만 거리가 가까워 이동 시간도 3분의 1 정도로 짧았다. 강우량도 적어 마음껏 훈련할 수 있는 곳으로 보았다. 사이판 훈련은 김용희(金用熙) 감독이 처음 실시한 특별훈련이기도 했다. 장래성이 있는 16명(투수 5명, 포수 2명, 야수 9명)의 젊은 선수들을 대상으로 30일 간 강도 높은 훈련이 계속됐다. 2002년 삼성은 중국 광저우 마무리 훈련을 마친 뒤 채 1주일도 되지 않아 1월 15일 애리조나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애리조나에서 강도높은 훈련을 마친 선수단은 다시 오키나와로 이동해 LG, SK와 연습경기를 가졌고, 계속해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의 2군리그라 할 수 있는 이스턴리그에 참가해 실전감각을 익힌 후 3월 9일에서야 귀국했다. 것으로 수정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훈련을 할 경우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2월 10일부터 3월 13일까지 미야자키와 오키나와에서 전지훈련을 갖기로 한 것이다.
1996년 오키나와 전지훈련은 1, 2군 전원이 참가한 가운데 1, 2차로 나누어 63일 동안 실시됐다. 1차로 1월 18일부터 헤이와노 모리구장에서 체력 단련을 위주로 한 기본 훈련을 실시했고 이어 2월 18일부터 귀국할 때까지 고자 시립구장에서 실전에 대비한 전술 훈련을 통해 기량을 연마했다.
1988년 2월 15일에는 박영길 감독의 인솔로 코칭스태프 8명과 선수 37명이 규수 중동부 해안가에 위치한 노베오카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1984년 후쿠야마 전지훈련 이후 4년 만에 다시 일본을 찾았다. 연습장인 니시시나 구장은 8년 전까지 긴데스가 스프링 캠프로 사용한 곳이었다.
1985년 이후 베로비치 다저타운을 다시 찾은 것은 1992년. 2월 5일부터 3월 3일까지 28일 간의 일정으로 김성근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 55명이 참가했다.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미국 전지훈련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시도한 미국 전지훈련은 한국야구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4년인 1985년에 단행한 이 전지훈련은 모험에 가까운 도전이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지훈련지는 일본이었다. 거리가 가까운 게 매력이었다. 그러나 일기 불순으로 훈련을 극대화할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다. 하지만 미국 플로리다의 2월 날씨는 우리의 초여름과 같았다. 또 풍족한 시설과 100년 가까이 쌓아온 노하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는 멀어도 완벽한 훈련과 선진야구를 습득하기 위해 미국을 택한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 전지훈련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프로야구가 갓 출범한 1982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초청할 당시 미국 전지훈련까지 추진, 3년 가까이 조사하고 검토한 끝에 LA 다저스의 스프링 캠프인 플로리다의 베로비치 다저타운에 캠프를 차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1982년 10월 LA 다저스 구단주 피터 오말리가 이건희 구단주를 예방한 자리에서 이루어진 기술 제휴 약속에 따라 진행된 것이다. 미국 첫 전지훈련의 결과는 아주 좋았다. 1985 시즌 통합 우승을 일궈낼 수 있었던 힘이 베로비치의 다저타운에서 모아졌기 때문이다. 다저타운은 주경기장인 홀만구장 외에 정규 규격의 훈련구장 3개와 배팅장 8개, 웨이트장 1개 등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숙박시설은 국내 1급 호텔 수준으로 식당, 회의실, 극장, 클럽 하우스, 당구장, 수영장 외에 테니스 및 농구 코트까지 갖추고 있어 선수들에게는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1985년 2월 28일부터 3월 13일까지 14일간 베로비치에서 익힌 야구는 지금까지 배운 야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때리고 달리고 또 이를 막는 것이 전부였던 야구는 LA 다저스를 통해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김영덕(金永德) 감독을 비롯한 정동진, 박영길, 유백만, 우용득 코치와 25명의 선수들이 14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배운 것은 첫째가 양보다 질이었다. 둘째는 과도한 연습보다 휴식이었고 셋째는 “왜?”라는 의문이었다. LA 다저스에서 파견 나온 레드 아담스(투수), 레오 포사다(타격), 치코 페르난데스(수비), 모리 윌스(주루) 코치들은 전문적인 기술보다 기본적인 것부터 장난치듯 가르쳤다. “왜?”라는 의문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한 가지를 가르쳐도 무조건 “나를 따르라”는 식이 아니었다. 의문이 생기면 선수가 이해할 때까지 토론을 벌였다. 많은 양보다 한 가지라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질을 중요시했다.
김영덕 감독의 눈으로 보면 훈련이 아닌 노는 것이었다. 짧은 기간을 통해 많은 양의 훈련을 원하던 김 감독의 눈에 불꽃이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미국 야구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의식의 충돌이었다. 훈련은 야간에도 계속됐다. 이론 강의도 뒤따랐다. LA 다저스 알 캄파니스 부사장은 야구 전반에 관해, 라소다 감독은 팀 운영, 모리 윌스 코치는 주루와 도루에 대한 강의로 선수들의 이해를 북돋웠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의 벽은 높았다. 3월 9일 홀맨 스타디움에서 유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진 LA 다저스와의 첫 친선경기에서 0-7로 패했다. 메이저리그 및 트리플A 선수들로 구성된 혼성 팀이었지만 실력은 비교가 안됐다. 이 경기는 삼성이 미국에서 메이저리그 팀과 치른 첫 공식경기이기도 했다. 연습경기는 이후에도 마이너리그 혼성팀과 두 차례 더 치렀지만 모두 0-4, 5-7로 패해 미국야구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그러나 수준 높은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기량과 경기 운영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베로비치 전지훈련을 통해 가장 득을 본 선수는 재일동포 투수인 김일융이었다. 김일융은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의 주무기인 포크 볼을 익혀 1985 시즌 25승을 올려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의 디딤돌이 됐다. 뿐만 아니라 공의 완급 조절까지 터득, 1987년 일본 프로야구에 복귀하여 다이요(大洋)와 야쿠르트에서 6년간 투수로 활약했다.
1992년 베로비치 전지훈련에서 라소다 감독, 가이 콘티, 레오 포사다 등 LA 다저스의 코칭스태프가 합류, 선진 야구 기술을 선보였다.
베로비치 다저타운을 다시 찾은 것은 1992년이다. 2월 5일부터 3월 3일까지 28일 간의 일정으로 김성근 감독을 비롯한 55명(코치 8명, 선수 38명, 지원 9명)이 참가한 이 전지훈련은 베로비치(2월 5일∼20일)에서 16일, 일본 노베오카(2월 23일∼3월 3일)에서 12일간 실시하는 것으로 짜여졌다.
7년 만에 찾은 베로비치 전지훈련은 투수 인스트럭터가 레드 아담스에서 가이 콘티로 바뀌었을 뿐 타격의 레오 포사다, 수비의 치코 페르난데스가 그대로 합류, 1985년과 같은 패턴으로 전문 기술 극대화에 심혈을 기울여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베로비치 전지훈련을 끝내고 귀국 길에 일본에서 실시한 노베오카 전지훈련은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시즌을 앞두고 있는 상태여서 전술훈련과 실전 감각을 살리기 위한 적응훈련에 들어갔으나 선수들이 시차 적응에 실패, 의도했던 훈련을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노베오카의 악몽은 1992 시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가까스로 4위(67승2무57패)를 차지,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롯데에 0-3(9월 25일 사직), 0-4(9월 26일 대구)로 완봉패를 당해 김성근 감독이 해임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전지훈련은 1993년에도 계속됐다. 우용득 감독으로 체제를 정비한 구단은 1월 28일부터 3월 4일까지 베로비치(1월 28∼2월 18일)와 노베오카(2월 19일∼3월 4일)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총 48명(코치 6명, 선수 34명, 지원 8명)이 참가한 베로비치 전지훈련에서 우 감독은 타격에 큰 비중을 두어 메이저리그 강타자 출신인 레지 스미스를 타격 인스트럭터로 기용했다. 레지 스미스는 메이저리그에서 17년간 평균 타율 0.287에 홈런 314개를 날린 것을 비롯, 4번 출전한 월드시리즈에서도 홈런 6개를 날릴 정도로 타격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또 수비를 담당한 치코 페르난데스는 1985년 및 1992년 미국 전지훈련과 1986년 마산 동계훈련에 인스트럭터로 합류, 해박한 야구 이론과 독특한 지도 방법으로 전력 향상에 도움을 준 바 있다. 또 투수들을 맡은 데이브 왈라스와 주루를 담당한 존 데뷔도 수준급의 코치였다. 미국 베로비치 훈련을 끝낸 뒤 2월 19일 장소를 노베오카로 옮겨 실시한 적응훈련은 투수를 위주로 한 것이었다. 베로비치에서 익힌 폼과 구질을 가다듬어 신인 박충식이 14승을 올린 것을 비롯해 김태한(14승), 김상엽(13승), 성준(12승) 등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백인천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1997년은 ‘훈련 투어’를 방불케 할 정도로 67일간의 긴 장정에 올랐다. 1996년 말 호주 마무리훈련에 이어 1997년 1월 27일부터 2월 19일까지 24일간에 걸쳐 베로비치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우용득 감독은 1995년 다시 베로비치를 찾았다. 1993년을 능가하는 전력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1993 시즌 우 감독은 73승5무48패로 2위를 차지,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나 2승1무4패로 패해 준우승의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호주 전지훈련을 다녀온 1994 시즌에서는 60승2무64패로 5위에 머물렀다. 호주 대신 미국(베로비치)을 다시 찾은 것은 전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였다. 훈련 기간도 2월 1일부터 3월 3일까지 잡았다. 체력훈련은 물론 기본 기술 연마와 전술훈련까지 한곳에서 끝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파업으로 비자 발급이 늦어져 4일이 늦은 2월 5일 58명(코치 8명, 선수 38명, 지원 12명)이 베로비치를 향해 떠났다. 메이저리그가 파업 중이어서 톰 라소다 감독을 비롯해 많은 코치들이 훈련 보조원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모두 자발적으로 훈련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막판에는 LA 다저스 소속 마이너리그 팀들과 5차례에 걸쳐 연습경기를 치러 풍부한 실전 경험까지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95 시즌 성적은 5위(60승6무60패)였다. 노장 선수들의 부진이 원인이었다. 류중일은 목디스크 재발, 김성래는 장딴지 부상, 강기웅은 발목 부상, 이종두는 어깨와 허리 통증으로 제 몫을 해내지 못했다. 백인천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1997년은 ‘훈련 투어’를 방불케 할 정도로 67일간의 긴 장정에 올랐다. 베로비치 전지훈련은 1월 27일부터 2월 19일까지 24일간에 걸쳐 실시됐다. 훈련의 효율성을 높이고 선진 야구기술 습득 및 전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 LA 다저스 마이너리그 코치 3명을 인스트럭터로 초빙했다. 투수는 글렌 그렉슨, 타격은 톰 베이어스 코치가, 수비는 글렌 호프만 트리플A 감독이 맡았다. 체력, 기술, 전술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백인천 감독은 선수들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1996년 말 호주(12월 3∼24일) 마무리 훈련 21일까지 합치면 45일간 훈련에만 매달려 온 셈이다. 하지만 백 감독은 베로비치 훈련이 끝나자 일본 오키나와(2월 23일∼3월 16일)로 이동, 전술훈련과 연습경기로 실전에 대비했다. 일본 햄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및 현지서 훈련 중인 국내 팀들과 8차례에 걸쳐 연습경기를 가진 끝에 22일간의 훈련을 끝내 프로야구 훈련사에 영원히 남을 또 다른 기록을 세웠다.
1999년은 플로리다의 포트 마이어스에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 전용 훈련장에 캠프를 차렸다. 서정환 감독을 비롯해 코치 7명과 선수 35명이 참가한 이 전지훈련은 1월 31일부터 3월 9일까지 계속됐다. 주위에 보스턴 레드삭스를 비롯해 미네소타 트윈스, 텍사스 레인저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등이 훈련 중이어서 연습경기를 치를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1999년은 플로리다의 포트 마이어스에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 전용 훈련장에 캠프를 차렸다. 서정환(徐定煥) 감독을 비롯해 코치 7명과 선수 35명이 참가한 이 전지훈련은 1월 31일부터 3월 9일까지 계속됐다.
LA 다저스 스프링 캠프가 있는 베로비치 대신 포트 마이어스를 찾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997년 LA 다저스가 자매 결연을 전제로 스프링 캠프 사용료로 250달러를 요구한 탓이었다. 그 동안 LA 다저스의 협조로 선진야구를 습득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고액의 사용료를 요구하는 데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포트 마이어스가 훈련에 지장을 줄 만큼 제반 시설이 낙후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베로비치나 오키나와에 비해 기후 조건도 양호했고 시설 또한 완벽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주위에 보스턴 레드삭스를 비롯해 미네소타 트윈스, 텍사스 레인저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등 4개 팀이 훈련 중이어서 연습경기를 치를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는 점이었다. 연습경기는 승패를 떠나 실전 감각을 익히는 데 최상의 훈련이었다.
1999 시즌에서 임창용이 51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하고 노장진(15승), 김상진(12승)이 제 몫 이상으로 마운드를 지켜준 것이나 이승엽(0.323, 홈런 54, 타점 123), 김한수(0.340, 홈런 18, 타점 89), 정경배(0.312, 홈런 18, 타점 53)가 3할대의 타율을 기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량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곳에서 훈련한 덕분이었다.2000년 애리조나 피닉스는 김용희(金用熙) 감독에게 야망의 땅이었다. 1999년 11월 11일 감독에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새천년 우승’의 꿈을 안고 찾은 전지훈련지였기 때문이다. 전지훈련은 1월 31일 코치 2명과 선수 11명을 선발대로 3월 8일까지 코치 8명, 선수 35명이 참가했다. 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현지에서 파드레스의 투수 코치인 데이브 래이쉬크와 외야 수비 및 주루 담당 코치인 에릭 블록을 인스트럭터로 기용했다.
또한 국내 프로야구 전지훈련 사상 처음으로 가족 초청 행사도 가졌다. 1999년 12월에 취임한 한행수(韓行秀) 사장이 4박5일(2월 22∼26일) 일정으로 가족을 초청한 것이다. 이 행사는 매일 반복되는 훈련으로 심신이 지쳐 있는 선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가족들에게는 땀 흘리며 열심히 훈련하는 선수들의 장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마련한 것이었다. 행사 비용은 구단과 선수가 공동으로 부담했다. 왕복 항공권은 선수가 부담한 대신 숙식과 관광 등 현지에서 소요되는 모든 비용은 구단이 부담했다. 가족 초청행사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가족 간에 화목을 다질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 것이어서 타 구단의 부러움을 샀다. 한 사장은 이 행사에 앞서 1월 16일 ‘가족의 밤’ 행사를 마련, 선수 및 프런트 가족까지 초청해 화합과 유대를 다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 사장은 7월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했고 팀은 드림리그서 3위를 차지, 어렵게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현대에 패해 김응룡(金應龍) 감독 시대를 맞게 됐다.애리조나 전지훈련은 2001년에도 계속됐다.
2000년 1월 31일부터 3월 8일까지 김용희 감독 등 코치 8명, 선수 35명이 참가한 가운데 애리조나 피닉스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현지에서 파드레스의 투수 코치인 데이브 래이쉬크와 외야 수비 및 주루 담당 코치인 에릭 블록을 인스트럭터로 기용했다. 또한 국내 프로야구 전지훈련 사상 처음으로 가족 초청 행사도 가졌다.
2000년 12월에 있었던 하와이 특별훈련을 마친 뒤 1월 15일부터 3월 5일까지 김응룡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 11명, 선수 42명이 참가했다. 2000년 10월 30일 프로야구 감독 계약 사상 최장 기간인 5년에 계약금 3억원, 연봉 10억원(연간 2억원)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지휘봉을 잡은 김응룡 감독의 첫 전지훈련이었다. 강한 카리스마를 내세워 선수들을 장악한 김 감독은 현지에서 인스트럭터를 기용, 팀워크와 체력 강화에 신경을 썼다. 삼성라이온즈에게 2002년의 출발은 2001 시즌이 끝나자마자 바로 시작되었다. 2001년 11월 29일 실시된 중국 광저우 마무리 훈련이 그 출발점이었다. 40여일간의 혹독한 마무리 훈련을 마친 코칭스태프와 22명의 선수단은 해를 넘겨 2002년 1월 10일 귀국했다. 하지만 귀국한 지 채 1주일도 되지 않아 선수단은 다시 애리조나로 기나긴 전지훈련을 떠났다. 1월 15일부터 시작된 애리조나 전지훈련은 어느 해보다 강도가 높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훈련을 소화해냈다.
애리조나에서 기술훈련과 전술훈련을 마친 선수단은 오키나와로 이동해 LG, SK와 연습경기를 가졌고, 계속해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의 2군리그라 할 수 있는 이스턴리그에 참가해 실전감각을 익힌 후 3월 9일 귀국했다. 광저우 훈련부터 도쿄 이스턴리그까지 약 70여일간의 길고도 험난한 전지훈련을 통해 우승의 칼날을 벼리고 돌아온 것이다.
전지훈련이 실전에 대비한 전술적인 것이라면 교육리그는 신인이나 젊은 선수들이 실전을 통해 자기 완성을 꾀할 수 있는 지름길로 통했다. 때문에 구단은 전지훈련 못지않게 교육리그에도 많은 투자와 관심을 쏟았다. 미국에서 개최된 교육리그에 처음으로 참가한 것은 1990년이다. 9월 15일부터 11월 3일까지 플로리다의 사라소타에서 개최된 미국 프로야구 교육리그에 KBO(한국야구위원회) 연합 팀 소속으로 유영수(柳永洙) 코치를 포함, 이상목(李相睦), 김인철(金寅哲), 이상훈(李相勳), 박용준(朴勇俊·이상 투수), 정존수(鄭存秀·포수), 이규창(李奎昌), 박규대(朴奎大), 정경훈(鄭京勳·이상 내야수), 박인구(朴仁球·외야수) 등이 참가했다. 실전을 통해 경기 감각을 익히고 미완의 기술을 보완하고 개발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훈련이었다. 당시 신인이었던 투수 이상목과 유격수 정경훈이 한화에서 기량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이 교육리그가 밑거름이 됐다. 1991년에는 코치 2명과 투수 2명을 LA 다저스 소속으로 애리조나 메사에서 개최된 교육리그(9월 8일∼10월 28일)에 파견했다. 2군 투수코치인 이선희와 2군 배터리코치 손상득(孫祥得)에게는 경기를 통해 투·포수의 기용과 운용 방법을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또한 투수 허삼영(許三榮)과 김인철은 현지에서 만난 LA 다저스 가이 콘티 코치로부터 투구 폼과 구질 및 수비에 관한 지도를 받았다. 가이 콘티는 이들의 훈련을 돕기 위해 특별히 기용한 인스트럭터였다. 허삼영이 싱커를 익히고 체인지 업을 던질 수 있었던 것과 김인철이 커브와 체인지 업 및 코너 웍의 구사력을 다듬을 수 있었던 것은 교육리그에서 가이 콘티를 만난 덕분이었다. 1992년 미국 프로야구 교육리그(9월 3일∼11월 1일·애리조나 메사)에는 권영호 코치와 투수 박용준과 이상목 및 포수 이영재가 참가했다. 권 코치는 투수의 지도방법을, 투수들은 피칭의 요령과 수비 방법을 익혔고 포수 이영재는 캐칭과 경기운영 방법 등을 익혀왔다. 1993년 하와이에서 개최된 윈터리그(10월 12일∼12월 7일)에는 경기를 통해 실전 기술과 경기 운용 능력을 높이기 위해 유망주들인 투수 최용희(崔龍熙), 최한경(崔韓慶), 외야수 신동주를 파견했다. 또한 삼성이 주축이 되어 연합군으로 참가한 1994년 교육리그(9월 15일∼10월 30일 애리조나 피닉스)에는 양준혁을 비롯한 선수 22명 외에 코치인 김충(金忠), 김용철(金容哲), 양일환(梁日煥), 장태수(張泰洙)를 파견했다. 몸으로 부딪혀 배워오라는 뜻이었다. 미국 교육리그의 성과가 높자 1995년에는 사상 최초로 2군 선수 전원이 단일 팀으로 교육리그(9월 16일∼10월 30일 애리조나 피닉스)에 참가, 45일 간 35경기에서 12승4무19패의 전적을 남겼다. 2군 선수 전원을 참가시킨 것은 실전경험 습득과 선수 개개인의 기량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1996년에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18일간 실시한 교육리그(10월 10∼27일)에 코치 5명과 선수 23명을 파견했다. 1996년 처음 실시한 오키나와 교육리그에는 한국 4개 팀을 비롯해 일본 5개 팀, 대만 1개 팀이 참가, 모두 14경기를 치렀다. 1997년에는 애리조나 교육리그(9월 20일∼11월 3일)에 코치 5명과 선수 20명을 파견, 총 36경기에 출전시켰다. 역시 실전을 통해 경기력을 향상시킬 겸 선진야구 기술 습득을 위해서였다.
교육리그는 신인들의 기량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됐다. 그러나 1997년을 끝으로 호주와 일본 등지에서 특별훈련을 실시하며 별도로 유망주 육성에 들어갔다. 1999년 사이판 특별훈련도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11월 30일부터 12월 29일까지 팔라시오스 구장에서 실시한 특별훈련에는 투·포수 16명 외에 신임 김용희 감독을 비롯해 계형철, 장호연 투수코치, 조범현 배터리코치, 김동재 수비코치, 박흥식 타격코치와 백인천 타격 인스트럭터까지 참가, 코치 1명이 선수 2명을 붙들고 밀착 지도를 펴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투수들 가운데 배영수, 이동은, 권오준, 야수들 중에서는 정경배, 김태균, 신동주 등의 기량이 크게 향상됐다. 2000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실시한 특별훈련(12월 2일∼24일·알라와이 구장)은 김용희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 10명, 선수 49명이 참가한 대규모 마무리훈련에 속했다.
1993년 지휘봉을 잡아 준우승이라는 열매를 딴 우용득 감독이 1994년 우승의 야망을 품고 떠난 곳은 호주 골드코스트(1월 23일~2월 19일)와 일본 노베오카(2월 20일~3월 5일). 미국을 버리고 호주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시차 적응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3년 지휘봉을 잡아 준우승이라는 열매를 딴 우용득 감독이 1994년 우승의 야망을 품고 떠난 곳이 호주 골드코스트(1월 23일∼2월 19일)와 일본 노베오카(2월 20일∼3월 5일)다. 미국을 버리고 호주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시차 적응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준우승의 열매를 안겨준 LA 다저스 코치들인 데이브 윌리스(투수)와 존 디보스(타격)를 인스트럭터로 초청, 1월 24일부터 2월 11일까지 36명의 선수들을 19일간 맡겼다. 이들은 1년 전 인연을 맺은 탓으로 선수들의 장·단점을 꿰뚫고 있어 훈련은 그만큼 수월하게 진행됐다.
호주 훈련은 체력 강화를 위주로 한 기량 연마에 중점을 두었다. 막판에는 전술훈련으로 팀워크를 다진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실전훈련과 연습경기로 시즌에 대비했다.
우용득 감독이 특별히 신경을 쓴 선수는 미국 대학야구에서 이름을 날린 투수 최용희였다. 1993년 8월 거금을 들여 스카우트한 탓도 있지만 마운드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용희는 1994시즌 6경기에서 1승2패1세이브(방어율 5.48)로 주저앉아 우 감독을 실망시켰다. 팀 성적도 60승2무64패로 5위로 밀려나 1995년 미국을 다시 찾는 동기가 됐다.
호주 전지훈련이 성적 부진으로 나타나자 두 번 다시 스프링 캠프를 차리지 않았다. 그러나 백인천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마무리훈련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백인천 감독이 호주를 찾은 것은 1996년 12월 3일부터 12월 24일까지 22일 동안이었다.
뉴 사우스주 리즈모 시립구장에 캠프를 차린 이 훈련은 그 유명한 ‘67일 간의 훈련 대장정’을 알리는 서막이기도 했다. 이 훈련에 참가한 선수들은 2진급 선수 15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1997년 미국-일본으로 이어지는 전지훈련에도 합류, 주전 선수의 꿈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것처럼 호주의 마무리 훈련은 1997 시즌 주전화를 목표로 한 전력 강화에 뜻을 두고 있었다.
백인천 감독은 1997년 11월 30일부터 12월 22일까지 뉴 사우스의 리즈모를 다시 찾았다. 신인들을 비롯해 그 해 활동이 저조했던 선수들과 1998 시즌 유망주들 35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서였다. 이 훈련 중반(12월 10∼19일)부터 1985년 통합 우승의 주역이었던 재일동포 김일융이 투수 인스트럭터로 합류, 볼의 완급 조절과 변화구 구사 요령을 지도했다.
1998년 시즌이 끝나자 서정환(徐定煥) 감독은 장호연, 김봉근 코치의 인솔로 투수 7명(이상훈, 감병훈, 변대수, 정현욱, 권오준, 김인철, 황두성), 포수 2명(정회열, 김영진)을 12월 4일부터 31일까지 브리즈번에 파견, 체력훈련을 겸한 기술훈련으로 기량을 다졌다. 이들 투수들은 1998 시즌 초 감독자회의에서 결정한 ‘12월 합동훈련 금지’ 방침에 따라 국내에서 개인 위주의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다.그러나 재활중인 투수의 경우 부상 재발의 위험이 따라 기후가 따뜻한 호주에서 특별 훈련을 실시했다.
우용득 감독을 위시한 코칭스태프 7명, 선수 36명이 참가한 1994년의 호주 훈련은 체력 강화를 위주로 한 기량 연마에 중점을 두었다. 막판에는 전술훈련으로 팀워크를 다진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실전훈련과 연습경기로 시즌에 대비했다.
전지훈련과 마무리훈련은 일본, 미국, 호주에서만 실시한 것은 아니다. 1990년에는 투수들만의 전지훈련을 필리핀에서 실시했다. 27명의 투·포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2월 6일부터 21일까지 마닐라 리잘메모리얼스타디움에서 실시한 이 훈련에는 마티 투수코치가 합류, 미국 프로야구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방법을 소개했다. 투수들에게는 변화구의 구사 능력뿐만 아니라 수비와 견제 동작까지 집중적으로 지도했다. 투구 동작과 퀵킹은 물론 투구 폼 교정과 변화구 구사에 따른 능력을 집중적으로 지도받았다. 마티 코치는 샌프란시스코 투수코치로 1989년 11월 3일 내한, 4일부터 22일까지 19일 동안 투수 인스트럭터로서 피칭에 대한 기술을 전수한 뒤 1990년 2월 1일 정식 코치로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2001년 11월 29일부터 2002년 1월 10일까지는 김응룡 감독의 인솔로 코칭스태프와 22명의 선수단이 중국 광저우에서 마무리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광저우는 김감독이 선호하는 훈련지로 쾌적한 날씨와 저렴한 비용 등으로 마무리훈련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일본 프로야구 저명 인사로 활동했던 재일동포 장훈 씨가 1984년 3월 8일부터 18일까지 11일 간 타격 지도를 했다.
국내 프로야구의 수준 향상과 활성화를 위해 일본 또는 미국 프로야구에서 지도자로 활동한 감독이나 코치들을 초빙, 선진야구 기술 도입의 물꼬를 튼 것은 1982년이다. 그 첫 번째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감독을 역임한 나가시마(長嶋茂雄)였다. 4월 20일부터 23일까지 4일간 머물며 구단 운영의 기법과 선수 관리에 대해 자문을 해줬지만 걸음마 단계인 구단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재산이 됐다. 5월에는 일본 프로야구의 거물들인 스기시다와 아오다가 내한, 투수와 타자들에게 근성과 자신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스쳐 지나가듯 잠깐 머물다 돌아가 전력 향상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선수들과 생활을 같이 하며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는 전임 코치가 필요했다. 1982 시즌이 끝난 10월 30일 재일동포 이충남(李忠男)을 조감독으로 영입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이충남을 조감독으로 앉힌 것은 첫째 우리보다 반세기 가까이 앞선 일본 프로야구의 기법을 도입할 수 있고, 둘째는 실업야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서영무(徐永武) 감독을 보필함으로써 경기 운영 방식에 일대 혁신을 꾀할 수 있다고 본 탓이었다.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南海) 호크스에서 선수 생활을 한 이충남은 난카이 코치를 거쳐 귀국하기 직전까지 한큐(阪急) 브레이브스에서 작전 및 주루 코치로 활약,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은 코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충남 조감독의 영입은 시기상조였다. 서 감독은 이충남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몸으로 익히고 배운 야구를 수용할 채비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지도방식에서도 견해 차이를 보여 갈등을 빚자 1983년 5월 26일 서 감독이 퇴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충남이 팀 사상 첫 감독대행을 맡아 1983 시즌을 이끌었지만 성적은 46승4무50패로 종합 5위에 그쳤다. 이충남의 입지도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단은 이충남을 필요로 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익힌 이충남의 노하우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즌이 끝난 뒤 팀 재건을 위해 김영덕(金永德) 감독을 영입하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충남(사진 가운데)은 1982년 10월부터 1년이라는 짧은 기간 조감독과 감독대행으로 재직했지만 선수들이 새로운 야구에 눈을 뜨게 했다.
이충남은 1년이라는 짧은 기간 조감독과 감독대행으로 재직했지만 선수들이 새로운 야구에 눈을 뜨게 했다. 내야 수비의 귀재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새로운 포메이션을 선보였고 주루 플레이에서도 국내에선 접해보지 못한 기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3년 10월 31일 일본으로 돌아갔던 이충남은 1990년 구단의 초청을 받아 인스트럭터로 방한, 1월 19일부터 26일까지 대구에서 코치와 선수들을 상대로 수비와 주루 및 3루 런너 코치에 대한 지도를 곁들여 해박한 식견을 털어놓았다. 이충남 이후 일본 프로야구 저명 인사로 활동했던 재일동포 장훈(張勳)이 1984년 3월 8일부터 18일까지 11일 간 타격 지도를 했고, 1985년 5월 24일에는 나가시마가 방한해 선수 관리 및 구단 운영에 따른 노하우를 전수했다.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의 LA 다저스 소속 코치를 인스트럭터로 국내에 불러들인 것은 1986년이다. 외환 사용 규제로 미국 전지훈련 길이 막히자 1985년 베로비치 전지훈련에서 큰 도움을 준 레오 포사다(타격)와 치코 페르난데스(수비)를 인스트럭터로 영입, 2월 11일부터 2월 26일까지 마산에서 이들의 기술 지도를 받았다. 이들은 1985년 베로비치 전지훈련 때와 마찬가지로 두서가 없었다. 배팅을 하다가 달리기도 하고 수비를 하다가 머리를 맞댄 채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가지 원칙만은 분명했다. 모든 훈련은 기초적인 것에서 시작했다. 그것도 이해하고 적응할 때까지 때리고 달리고 던지는 훈련이 반복됐다.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미국인 코치를 정식 코치로 계약한 뒤 페넌트레이스에 참여시킨 것도 삼성이었다. 1989년 12월 30일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 준우승 팀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트 산하 트리플 A팀의 마티 디메리트 투수코치와 한 시즌(1990년 2월 1일∼11월 30일) 계약을 체결했다.
마티를 투수코치로 영입하게 된 것은 1989년 11월 4일부터 22일까지 실시한 마무리훈련에 재미동포인 윈델 김과 합류, 투수들을 지도한 것이 인연이 됐다. 훈련 기간은 19일로 짧았지만 투수들의 호응도가 높고 미국에서도 화제가 됐던 마구(魔球·스플리트 핑거드 패스트볼)를 선보인 때문이었다. 마티는 1983년 샌프란시스코 산하 싱글 A팀인 클린턴 자이언트서 코치를 시작, 1988년에는 피닉스 자이언트 코치로 옮겨 8명의 투수들을 메이저리그에 진출시키면서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뿐만 아니라 로저 크레이그 감독으로부터 전수받은 스플리트 핑거드 패스트볼(일명 스피드 드롭볼)을 선보여 메이저리그에서 화제가 됐었다.
1992시즌 타격코치로 활동한 도이 마사히로(세이부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는 선수 개개인의 신상 파악은 물론 타격의 장단점을 지적하면서 한치의 오차없는 지도를 했다.
국내 프로야구에 마티 코치가 남긴 흔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마구를 선보인 것 외에 투수의 훈련방법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투수들이 연습할 때 많이 뛰고 많이 던지던 방식에서 짧게 뛰고 적게 던지는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티가 어깨 보호를 위해 적게 던지기를 권유하면서 미국식 야구를 선호하는 감독과 코치들 사이에 나타난 징후였다. 1991년 걸프 전쟁에 따른 에너지 절약 방침에 따라 미국 전지훈련(플로리다 베로비치)을 취소한 구단은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LA 다저스 산하 싱글 A팀인 베이커스 필드 다저스의 투수코치 가이 콘티를 인스트럭터로 초빙한 뒤 시즌이 시작된 4월 1일 요미우리의 나가시마 감독이 추천한 오가와(小川邦和)와 투수코치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타력과 수비 및 주루 플레이를 강화하기 위해 데라오카(寺岡孝)를 구단에 추천, 2월 16일부터 3월 16일까지 인스트럭터로 기용한 뒤 4월 1일부터 한 시즌 동안 타격코치로 주저앉혔다. 시즌 오픈을 눈앞에 두고 있는 데다 마땅한 타격코치도 없어 구단이 시한부 코치로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에 1승3패로 패하자 일본인 코치들은 설 땅을 잃은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대신 투·포수 및 내야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1989년 가을 투수 인스트럭터와 1990년 투수코치를 역임했던 마티(10월 29일∼11월 28일)를 비롯해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마이너리그 수비코치인 멘솔리노(11월 19∼28일), LA 다저스 마이너리그 순회코치인 루인스 티엔트(10월 16일∼11월 30일)를 초빙했다.
마티는 한 달 동안 머물면서 투수들의 투구 폼 교정은 물론 구질의 연마와 집중력 강화 훈련에 열을 올렸다. 또한 휴무일에는 대구·경북지역 중·고교를 순회 방문, 선수들을 지도함으로써 지역 야구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1997년 5년만에 일본인 후지시로가 투수 코치로 기용돼,11월 1일부터 1998년 10월 30일까지 활동했다. 1991년 2월 6일부터 인스트럭터로 초빙해 기술지도를 받은 LA 다저스 투수코치인 가이콘티
멘솔리노도 포수들을 상대로 포구와 송구 동작 및 블로킹 능력을 업그레이드시켰고 내야수들에게는 수비 포메이션과 베이스 런닝을 집중적으로 지도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1992년에는 세이부(西武) 라이온즈에서 1군 타격코치를 역임한 도이 마사히로(土井正博)와 계약을 체결했다. 도이는 1월 12일부터 11월 20일까지 타격코치로 재임하면서 선수들에게 정교한 타법을 선보였다. 도이 코치는 1962년 긴데스에 입단, 19살 나이에 4번 타자를 맡을 정도로 타격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1975년 홈런왕을 차지하는 등 1981년 세이부에서 은퇴할 때까지 안타 2,452개(일본 통산 8위), 홈런 465개(통산 10위)를 날렸다. 1987년 세이부 1군 타격코치 시절 기요하라(淸原)를 인기 스타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투수 인스트럭터로 가이 콘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2월 5일부터 시작된 미국 플로리다 베로비치 전지훈련에서였다. 가이 콘티는 2월 23일부터 시작된 일본 노베오카 전지훈련은 물론 3월 3일 귀국, 시범경기 기간에도 투수들에게 변화구의 구사와 수비 방법에 대한 지도를 실시했다. 외국인 전담 코치 기용은 김성근 감독이 1992년 10월 4일 성적 부진으로 퇴진하면서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크게 효과를 거두지 못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인스트럭터 기용까지 막힌 것은 아니었다.
김성근 감독이 떠난 직후인 10월 16일 LA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 순회코치인 루이스 티엔트를 인스트럭터로 초빙해 11월 30일까지 46일 간 투수 지도를 맡겼다. 특히 1995년에는 2군 투수들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메이저리그 투수 출신으로 토론토 블루제이스 마이너리그서 스카우트와 투수코치를 역임한 대릴 패터슨을 초빙했다. 3월 4일부터 4월 3일까지 2개월간 투수 인스트럭터로 활동한 패터슨은 기본기에 충실한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어린 선수들에게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탁월한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1992년 롯데에서 3개월간 인스트럭터로 있으면서 염종석(廉鍾錫)이라는 신인을 발굴, 우승의 발판을 마련한 것도 이러한 지도 방법이 밑거름이 됐다. 1995년 기용한 인스트럭터 중에 왕정치(王貞治)를 대스타로 키운 아라카와(荒川)도 빼놓을 수 없는 타격의 이론가다. 스타 덤에 오른 양준혁(梁埈赫)의 타격 자세를 점검할 겸 스타를 꿈꾸는 젊은 선수들에게 타격 이론을 주입시키기 위해 7월 4일부터 12일까지 8일간 인스트럭터로 초빙했다.
1997년에는 1, 2군 선수들의 주루 플레이와 내야 수비를 강화하고 아마야구 지도자들의 교육을 위해 모리 윌스를 8월 11일부터 21일까지 인스트럭터로 초빙했다. 모리 윌스는 1985년 베로비치 전지훈련 때 주루 훈련을 담당, 본토 야구의 기법을 선보여 통합 우승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또 1992년 베로비치 전지훈련 때도 인스트럭터로 참여, 주루 플레이의 진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1997년 5년간의 침묵을 깨고 일본인 후지시로(藤城和明)가 투수 코치로 기용돼, 11월 1일부터 1998년 10월 30일까지 활동했다.
국내 프로야구에 마티 코치가 남긴 흔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마구를 선보인 것 외에 투수의 훈련방법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이 1997년 11월 1일부터 16일까지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피터스버그에서 실시되었다.
외국인 선수들이 국내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경기장을 누비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시즌부터다. 외국인 선수 수입은 1996년 7월 4일 취임한 한국야구위원회 홍재형 총재의 역점 사업으로 추진, 12월 26일 임시구단주총회에서 외국인 선수 수입을 정식으로 의결함으로써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삼성은 그 이전부터 전력 평준화와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 등 돌린 팬들을 다시 불러 모으자는 취지에서 외국인 선수의 수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었다. 외국인 선수 수입은 늦은 감이 있었지만 약한 팀들에게는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1997년 1월에는 외국인 선수 고용추진기획단이 구성되어 용병시대를 열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선수 수급은 미국 스포츠 마케팅 회사인 CSMG를 통해 이루어졌다. CSMG는 마이너리그 에이전트들에게 트라이 아웃에 참가해줄 것을 요청, 총 54명이 테스트에 응했다. 이들은 쌍방울을 제외한 7개 구단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플로리다의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5차례의 평가전을 통해 기량을 선보였다.
사상 첫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는 11월 14일(한국시간)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힐튼호텔에서 실시됐다. 드래프트 순서는 1995∼97년까지 3년간 페넌트레이스 성적을 합친 승률의 역순으로 이루어져 ①현대 ②한화 ③롯데 ④OB ⑤삼성 ⑥LG ⑦해태의 순으로 7개 구단이 5명씩 총 35명을 지명했다. 7개 구단이 5명을 지명한 것은 그 가운데서 기량이 가장 뛰어난 선수 2명을 추려내기 위해서였다. 연봉도 상한선을 두어 입단 보너스와 부대 비용을 합쳐 12만 달러로 엄격히 제한했다. 삼성이 잡은 선수는 메이저리그 경력을 안고 있는 투수로 호세 파라(Jose Miguel Parra)와 스콧 베이커(Scott Baker)였다. 1998 시즌 성적도 수준급이어서 2명 모두 성공한 셈이었다. 호세 파라는 평가전에서 148km의 강속구로 2이닝 동안 7명의 타자를 상대로 피안타 1, 탈삼진 3개를 기록, 1순위로 계약금 3만 달러, 연봉 8만 달러 등 11만 달러에 입단했다. 성적은 구원투수부문 4위에 오를 정도로 60경기에서 7승8패19세이브(방어율 3.67)를 올렸다.
2001년 12월 16일 SK에서 트레이드한 유격수 틸슨 브리또는 2002시즌 타율 0.283에 그쳤지만 내야 수비수의 핵으로 홈런(25), 타점(90), 득점(89)에서 7위에 올라 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스콧 베이커는 1996년 오클랜드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에 출전한 경력은 있었으나 승패를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평가전에서 3경기에 등판, 6이닝 동안 25타자를 상대로 방어율 1,50(피안타 5, 피홈런 1, 사사구 3, 탈감진 7, 자책점 1)을 기록했다. 계약금(2만 달러)이나 연봉(6만 달러)은 호세 파라에 뒤졌으나 26경기에서 15승7패(방어율 4.13)를 올려 페넌트레이스 2위를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정도의 투수라면 1999 시즌 다시 한번 마운드에 내세우고 싶은 게 구단의 욕심이었다. 그러나 1998 시즌이 끝난 뒤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호세 파라의 트레이드를 타진하고 나왔다. 본인도 일본에서 뛸 것을 희망, 사상 최초로 외국인 선수를 현금 8만5,000달러에 트레이드하는 선례를 남겼다.
스콧 베이커는 1998 시즌 무릎과 발목을 다쳐 고생한 일이 있었다. 이상이 없을 경우 재계약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베이커는 구단이 지정한 LA의 캘란조브정형외과에서 정밀 진단을 받지 않은 채 연봉 25만 달러(약 3억2,500만원)를 요구해 왔다. 무리였다. KBO 이사회에서는 외국인 선수와 재계약할 경우 전년도 연봉 10%를 상한선으로 묶어놓고 있어 베이커가 받을 수 있는 연봉은 8만8,000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연봉은 조정이 가능했지만 부상 상태가 석연치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1999년 선을 보인 선수가 찰스 스미스와 빌리 홀이었다. 1999 시즌에 대비한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는 1998년 11월 18일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두 번째로 실시했다. 이번에는 쌍방울까지 포함한 8개 구단이 36명을 지명했다. 삼성은 1순위로 내야수인 찰스 스미스(Charles Lee Smith), 2순위로 빌리 홀(Willam Earl Hall)과 11월 21일 계약을 마쳤다. 찰스 스미스는 계약금 2만 달러, 연봉 8만 달러 등 10만 달러였고 빌리 홀은 계약금 2만 달러, 연봉 6만 달러 등 8만 달러였다. 특히 스미스는 1999 시즌 힘있는 타격으로 홈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타율은 0.287로 10걸 속에 들지 못했지만 홈런 3위(40), 장타율 3위(0.635)에 올랐다. 특히 7월에는 6경기에서 연속 홈런을 터트려 연속경기 최다홈런과 연속경기 최다득점(12점) 기록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홀은 평범한 선수였다. 빠른 발을 이용, 도루(47·2위)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뿐 타율도 0.244로 저조해 1999 시즌을 끝으로 방출됐다.
왼손투수 나르시소 엘비비라는 임창용과 함께 좌.우 선발로 한 축을 맡아 22경기에서 방어율 1위(2.50)로 13승을 올렸고, 2002 한국시리즈에서 1차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2000년에는 찰스 스미스와 연봉 15만 달러에 재계약한 뒤 메이저리그 타격왕 출신 훌리오 프랑코를 연봉 18만 달러, 옵션 2만 달러(타율 0.320 이상)에 끌어들였다. 프랑코는 국내에 수입된 외국인 선수 중 유일하게 타이틀을 수상한 선수답게 한 경기서 3홈런(5월 17일 대구 두산전)을 날리는 등 대단한 타격 솜씨를 선보여 타율 0.327(6위)에 타점 110(3위), 홈런 22개를 기록했다. 그러나 마운드 보강이 절실한 상태여서 재계약을 포기했다. 1999 시즌 기대 이상의 실력으로 재계약한 스미스도 불어나는 체중을 감당하지 못해 7월 22일 퇴출시켰다. 대신 투수인 마이클 가르시아를 끌어들여 마운드를 보강했다. 하지만 13경기에서 2승5패(방어율 2.91)에 그쳐 실망을 안겼다.
외국인 선수 정원이 3명으로 불어난 2001년 투수 보강을 위해 메이저리그 출신인 살로몬 토레스(Salomon Torres)와 외야수 매니 마르티네스(Manuy Martinez)를 확보한 뒤 투수 벤 리베라(Bienvenido Rivera)를 영입했다. 토레스는 프로 8년생으로 메이저리그에서 5년간 활동한 경력을 안고 있었다. 볼이 빠르고 변화구도 다양해 통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2001 시즌 2경기에서 2패를 당해 실망을 안겼다. 5와⅓이닝 동안 방어율 20.25라는 형편없는 기록을 내 퇴출시킨 뒤 일본 프로야구에서 이름을 날렸던 발비노 갈베스(Balvino Galvez)를 연봉 20만 달러에 영입했다. 갈베스는 일본 요미우리에서 5년간 46승43패(방어율 3.31)를 올린 투수답게 타자들을 압도했다. 8월까지 15경기서 10승4패(방어율 2.47)를 올려 김응룡 감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8월 20일 어머니가 위독하다며 출국한 뒤 귀국을 차일피일 미뤄 구단을 애먹이기도 했다.
외국인 선수 가운데 리베라만큼 확실한 마무리 투수도 없었다. 장신(201cm)에서 내려 꽂는 150km의 강속구를 주무기로 전반기까지 36경기서 6승3패21세이브(방어율 2.62)를 올렸다. 7월 12일 일본에서 허리 부상을 치료 받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한 뒤 인연을 끊었다. 리베라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입단한 선수가 카를로스 바에르가(Carlos Baerga) 였다. 1990년 메이저리그에 데뷔, 1992년부터 3차례에 걸쳐 올스타에 선정된 클러치 히터라는 평과는 달리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매니 마르티네스는 시즌 끝까지 이승엽, 마해영과 함께 클린업 트리오를 형성, 공격의 핵으로 팀을 이끌어 128경기에서 타율 0.278을 기록하며 홈런 25개, 타점 96점을 뽑았다. 또한 8월 17일 대구에서 벌어진 한화전 3회 말 이승엽, 바에르가, 마해영과 함께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4연속 홈런을 터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팀이 준우승에 그쳐 더 이상 각광을 받지 못한 채 삼성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염원이 그 어느 해보다 강했던 2002년은 1월에 투수 브론즈웰 패트릭과 강타자 매트 루크를 영입, 마운드와 타선을 한층 강화시켰다. 하지만 시즌에 접어들자 패트릭은 원인 모를 부진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루크는 어깨 부상으로 5월 퇴출을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2001년 12월 16일 SK와이번스에서 트레이드한 유격수 틸슨 브리또와 루크 대신 투입된 왼손 투수 나르시소 엘비라가 기대 이상의 활약으로 팀을 위기에서 건져냈다.
브리또는 2000년 SK가 스카우트한 유격수로 2년 연속 뛰어난 수비를 선보이며 3할대의 타율을 기록한 선수였다. 2002 시즌에서는 타율 0.283에 그쳤지만 내야 수비의 핵으로 홈런(25), 타점(90), 득점(89)에서 7위에 올라 팀이 한국시리즈에 지출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2002년 브리또는 삼성에서 외국인 선수 최초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까지 했는데 외국인 선수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는 롯데 호세, 한화 로마이어, 두산 우즈에 이어 역대 통산 네 번째였다. 일본에서 활약한 경험이 있는 엘비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창용과 함께 좌·우 선발로 한 축을 맡아 22경기에서 방어율 1위(2.50)로 13승을 올렸고 한국시리즈에서 1차전을 승리로 이끌어 우승의 원동력이 됐다.
연도 | 선수 | 위치 | 계약금 | 연봉(단위 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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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 스콧 베이커 호세 파라 |
투수 투수 |
20,000 30,000 |
60,000 80,000 |
1999 | 찰스 스미스 빌리 홀 |
내야수 내야수 |
20,000 20,000 |
80,000 60,000 |
2000 | 찰스 스미스 훌리오 프랑코 마이클 가르시아 |
내야수 외야수 투수 |
150,000 180,000 80,000 |
|
2001 | 벤 리베라 살로몬 토레스 매니 마르티네스 발비노 갈베스 사를로스 바에르가 |
투수 투수 외야수 투수 내야수 |
200,000 180,000 180,000 200,000 100,000 |
|
2002 | 브론즈웰 패트릭 매트 루크 틸슨 브리또 나르시소 엘비라 |
투수 외야수 내야수 투수 |
200,000 180,000 120,000 140,000 |
1999년 삼성이 지명한 선수는 찰스 스미스와 빌리 홀. 특히 스미스(오른쪽)는 1999 시즌 힘있는 타격으로 홈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매니 마르티네스는 시즌 끝까지 이승엽, 마해영과 함께 클린업 트리오를 형성, 공격의 핵으로 팀을 이끌어 128경기에서 타율 0.278을 기록하며 홈런 25개, 타점 96점을 뽑았다. 또한 8월 17일 대구에서 벌어진 한화전 3회 말 이승엽, 바에르가, 마해영과 함께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4연속 홈런을 터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팀이 준우승에 그쳐 더 이상 각광을 받지 못한 채 삼성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