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로 부터 사랑받는 팀, 근성있고 호쾌한 야구를 하는 팀!
삼성라이온즈 볼파크’는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야구 종합 훈련장이다. 라이온즈 볼파크의 모태는 1985년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에 대한 이건희(李健熙) 구단주의 선물이라 할 수 있는 경산 훈련장이었다. 경산훈련장은 1986년 2월 이건희 구단주의 지시로 종합 훈련장 건설에 착수해 1987년 6월 8일 준공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공사를 거듭하여 국내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라이온즈 볼파크로 변모되었고 삼성 선수들의 요람이 됐다. 1982년 2월 3일 팀이 갓 창단했을 때만 해도 선수들은 연습할 곳이 없어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아니면 두류산 공원을 맴돌았다. 하다못해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피할 비닐 하우스도 없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학생야구는 물론 실업야구도 이런 식으로 훈련을 해온 탓이었다. 프로야구 탄생으로 훈련 방식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훈련량만 대폭 늘어났다. 하루 7시간 훈련은 기본이었다. 배팅 연습을 위주로 한 스파르타식 훈련이었다. 타자들은 하루 볼 300개를 쳐냈다. 노크 볼도 수없이 받았다. 투수들은 체력 훈련을 시작으로 맨손 피칭 200번, 30m 볼 던지기 30분 코스를 거쳐 본격적인 피칭훈련에 들어가 볼 200개를 던져야 했다. 밤이라고 쉴 짬이 없었다. 선수면 누구나 개인 훈련을 가졌다.삼성라이온즈가 실내 연습장을 마련한 것은 1983년 3월 30일이다. 제일모직 사장을 겸하고 있던 이수빈(李壽彬) 사장이 보다 능률적인 훈련을 위해 대구시 침산동 제일모직 대구공장 안에 ‘승리관’을 개관했다. 투수들은 물론 야수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훈련의 요람이기도 했다. 비바람이 불고 눈이 내려도 내·외야 수비훈련은 물론 배팅훈련까지 실시할 수 있는 전천후 연습장이었다. 승리관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1987년 6월 경산 훈련장이 완공될 때까지 선수들의 땀방울로 얼룩졌다. ‘삼성라이온즈 볼파크’ 탄생의 모태가 된 연습장이었다.
삼성 라이온즈가 실내 연습장을 마련한 것은 1983년 3월 30일. 보다 능률적인 훈련을 위해 대구시 침산동 제일모직 대구공장 안에 승리관을 개관했다. 투수들은 물론 야수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훈련의 요람이기도 했던 승리관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1986년 6월 경산 훈련장이 완공될 때 까지 선수들의 땀방울로 얼룩졌다.
이건희 구단주의 꿈은 삼성라이온즈를 미국의 LA 다저스나 일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같은 명문 구단으로 키우는 일이었다. 연고지는 비록 대구·경북지역이지만 ‘온 국민의 야구단’, ‘페어플레이의 야구단’, ‘꿈을 심는 야구단’으로 불리는 명문 구단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 과감한 투자와 적극적인 운영으로 선도적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경산 훈련장 건설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경산 전용훈련장은 1985 시즌 ‘통합 우승’을 계기로 부지를 마련, 건설에 박차를 가했지만 이 구단주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그리던 일이었다. 경산 전용훈련장 건설을 앞둔 1985년 12월 25일 이건희 구단주는 국내 스포츠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마음놓고 훈련할 수 있는 경산 훈련장 건설과 관중들이 안락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을 대폭 개수하고 시설도 대폭 보완하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다. 경산 훈련장을 훈련 그 자체보다 꿈나무들을 육성하고 야구의 저변 확대를 꾀할 수 있는 터전으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또 대구구장 개·보수 및 시설을 보완하겠다는 것은 시민들이 편안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한국 프로야구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경산 훈련장은 이건희 구단주의 지시로 1983년 1월 부지 매입에 들어갔다. 경북 경산시 진량면 선화리에 있는 제일모직 예비군 훈련장으로 대지 면적 1만1,566평이었다. 1986년 2월 1일에 착공해 1987년 6월 8일 준공한 경산 훈련장은 총 면적 3,800평으로 국제 규격에 맞춘 구장이었지만 제반 부대시설은 미비했다. 1991년 11월 19일에는 선수들의 전용 숙소인 ‘필승관’을 착공, 10개월 뒤인 1992년 9월 25일 준공을 보았다. 총 공사비 10억여원을 들여 건설한 ‘필승관’은 야구훈련장 바로 옆 180평의 대지에 세워진 총 건평 350평 규모의 콘크리트 2층 건물로 외벽은 붉은 벽돌로 산뜻하게 치장을 했다.
1991년 11월 19일에는 선수들의 전용 숙소인 필승관을 착공, 10개월 뒤인 1992년 9월 25일 준공을 보았다. 총 공사비 10억여원을 들여 건설한 필승관은 야구훈련장 바로 옆 180평의 대지에 세워진 총 건평 350평 규모의 콘크리트 2층 건물이었다.
‘필승관’은 중앙 현관을 중심으로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배치, 1층(176평)은 식당, 주방, 샤워실, 탈의실, 코칭스태프 회의실, 귀빈실, 사무실과 오락시설을 갖춘 휴게실이 들어섰고 2층(174평)은 휴게실을 비롯해 1인 1실인 3평 크기의 방 20개(침대 15, 온돌 5)와 2인 1실인 4.2평 크기의 방 10개(침대 5, 온돌 5)를 만들어 40명의 선수들이 일시에 숙박이 가능하도록 했다. 1층 휴게실에는 선수들의 취미 생활을 돕기 위해 당구를 비롯해 탁구, 바둑, 장기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했고 2층 휴게실에는 위성 안테나를 설치, 일본이나 미국 프로야구를 TV를 통해 접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경산 훈련장이 새 단장을 끝내고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라이온즈 볼파크’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6년 3월 28이다. 삼성은 1995년 7월 6일 경산 훈련장의 증설 현대화 작업에 들어가 2층짜리 숙소인 ‘필승관’을 4층으로 증축, 편의시설을 갖춘 4.8평 크기의 방을 46개로 늘려 1인 1실 시대를 열었다. 또한 숙소 뒤편 110평 대지에 4층 규모의 체력단련동을 건설하여 체력훈련의 극대화를 꾀했다. 연면적 652평으로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독립 건물인 체력단련동은 웨이트 트레이닝실(2층)을 비롯해 물리치료실과 마루운동실(3층), 수영장과 사우나(지하 1층) 시설을 갖춰 훈련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켰다. 또한 감독실과 코칭스태프실을 1층에 마련, 선수들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4층에는 대강당을 비롯해 각종 자료실을 마련, 언제든 필요한 선수는 비디오의 분석과 기록을 열람토록 했다. 2군 경기의 전용 구장이자 주훈련장인 주경기장이 현대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도 이 때였다. 주경기장은 현대화 공사를 통해 1,200명이 관람할 수 있는 관람석(293평)까지 갖추었고 1, 2군의 연습 경기는 물론 전광판을 설치해 정규 경기도 치를 수 있게 했다. 또한 야간 조명시설을 갖추어 야간경기도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내야 연습장인 보조 구장(연면적 635평)까지 함께 완공, 내·외야수는 물론 투수들까지 합동 훈련이 가능하게 됐다.
실내 연습장은 연면적 867평 규모로 철근 콘크리트에 돔 구장 건축 양식인 ‘스페이스 프레임’ 방식을 도입, 자체 채광이 가능해 언제 어느 때나 훈련이 가능토록 설계됐다. 바닥은 인조 잔디를 깔아 정규 구장 내야를 방불케 했다. 또한 투수연습장까지 마련되어 있어 한 자리에서 내야 수비는 물론 배팅과 피칭훈련을 소화할 수 있는 공간을 갖추고 있다. 이렇듯 라이온즈 볼파크는 모든 훈련 시설을 겸비한 전천후 야구전용 훈련장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또한 ‘삼성라이온즈 볼파크’ 안에는 2층 규모의 건평 110평짜리 야구 역사관이 건립되어 프로야구 초창기의 귀중한 자료와 사진은 물론 삼성야구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희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유명 선수들의 땀에 젖은 유니폼을 비롯해 삼성야구가 배출한 우수선수들의 브로마이드 사진, 20여년간 정리하고 수집한 각종 자료와 기념품 및 선수들의 애장품 등도 전시되어 있다.
삼성라이온즈를 가리켜 명문 구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느 구단에 앞선 과감한 투자와 공격적인 경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건희 구단주는 일찍부터 구단의 흑자 기조를 다지기 위해 다각적으로 연관된 사업을 구상하기도 했다.그 첫 번째가 1983년 말 구상했던, 대구시와 공동으로 두류산 공원 운동장을 야구장으로 건설한다는 안이었다. 일본 세이부(西武) 라이온즈 구장과 같은 환경 친화적인 공원구장을 건립할 계획이었다.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은 주변 환경이 복잡할 뿐 아니라 주차시설이 비좁고 경기장도 협소해 장기적인 안목에서 두류공원 운동장을 야구장으로 개조, 시민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보다 안락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휴식처를 제공하자는 데 그 뜻을 두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구장 건설안도 나와 있었다. 구장 건설비로 150억원을 계산했으나 공사 기간 3~5년을 감안할 경우 총 공사비는 250억원 안팎이 투입될 것으로 추정까지 했었다. 관중 3만명 안팎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적 시설을 갖추고 주변은 조경 사업을 통해 시민공원을 만들 계획이었다. 또 구장이 완공되면 대구시에 기부 체납한 뒤 장기 임대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공원 소유주인 대구시의 반대로 전용구장 건설 계획은 무산됐다. 하지만 전용구장 건립은 구단의 숙원 사업이기도 했다. 전용구장 건설에는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지만 구단의 흑자 경영의 기조를 다질 수 있는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었다. 전용구장 건설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1991년 4월 5일 이건희 구단주가 언론사의 인터뷰에서 “삼성구단이 2천년대에 세계적인 명문구단으로 발전하기 위해 전용구장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였다. 이 구단주가 생각하는 전용구장은 ‘야구만을 위한 야구장이 아니라 지역 사회 주민들이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고 체육 및 문화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는 복합적인 시설’이었다.
또한 이건희 구단주는 1993년 7월 31일 MBC-TV에서 방영된 ‘이건희 신드롬의 충격파’라는 프로그램에서 “빠른 시일 안에 대구시내에 있는 제일모직 공장을 구미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야구 전용구장을 비롯한 병원, 슈퍼마켓 등 복합 시설물을 세우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6월 1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었던 삼성 임원 교육 현장 강연 내용을 녹화한 것으로 구단주가 직접 전용구장 건립 위치까지 밝힌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구 제일모직 공장은 10만여평에 달해 전용구장을 건립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제3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일반 주거지역으로 묶여 있어 제일모직 공장 부지 활용 계획은 백지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용구장 건립 계획은 무산됐지만 자립 기반을 다지기 위한 숙원 사업은 멈출 수가 없었다. 국내 프로야구 구단으로서는 최초로 시도한 사업이 1993년 11월 23일 서울 서초동 삼성 체육관 자리에 세운 삼성 레포츠센터였다. 1990년 9월에 착공하여 3년여의 공사 끝에 준공을 본 삼성 레포츠센터는 흑자 경영을 앞당기기 위한 과감한 도전이기도 했다. ‘경산 볼파크’가 선수들의 복지 증진과 체계적인 훈련을 위한 투자였다면 레포츠센터는 프로야구로 인한 만성 적자를 해소하고 흑자 경영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어서 주목을 끌었다. 2,000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삼성 레포츠센터는 연건평 6,500평의 지하 4층, 지상 5층짜리 복합 시설로 단일 스포츠센터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오존 살균 시스템과 최첨단 배수 시스템을 구비한 넓은 수영장(830평)은 유아 풀장을 비롯, 중·대형 풀장을 갖춰 연령별로 즐길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 280평의 헬스장은 80여대의 컴퓨터 헬스기구와 139m의 조킹 트랙까지 갖춰 최첨단 시설을 자랑했다. 28레인의 볼링장과 실내 골프장은 볼러와 골퍼들이 박진감 넘치는 분위기에 젖을 수 있도록 독특한 화상 처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또한 60명이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에어로빅실 외에 전통 예술과 차밍, 어학 등 다양한 교양강좌를 들을 수 있는 문화센터는 물론 각종 편의시설까지 갖춰 지역 주민의 건강 증진과 여가를 선용할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각광을 받게 됐다. 그러나 전용구장 건립의 꿈은 접을 수 없었다. ‘삼성 레포츠센터’의 완공으로 한 가지 숙원 사업은 성취했으나 구단 운영의 골격인 전용구장 건립에 대한 의욕은 해마다 검토됐다. 특히 1990년대 중반 ‘2000년대를 위한 전용구장 건립 계획안’을 수립, 내부 검토를 거친 뒤 대구시와 본격적인 협의에 들어갔다. 대구시가 고산지구에 조성할 대구대공원 예정지 6백70만평 가운데 5만여평을 부지로 제공받아 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용구장을 건립한다는 야심찬 계획까지 세웠으나, IMF 경제 위기 등으로 전용구장 건립의 꿈은 뒤로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1989년 대구구장 개·보수 공사를 지휘하고 있는 김운용 사무차장.(가운데)
프로야구 출범으로 한국 스포츠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1982년만 해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은 썰렁하고 볼품 없는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라운드도 풀 한 포기 없는 맨바닥이었다. 야간 경기란 생각도 못했다. 야간 조명시설은 예산 부족으로 설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내세울 수 있는 시설이란 1975년에 설치한 전광판과 낡은 음향기기가 전부였다. 그러나 2000년까지 50여회에 걸쳐 시설을 개·보수한 끝에 지방구장으로는 드물게 쾌적한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잡았다.이런 대구구장에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밝혀진 것은 1982년 7월 2일이었다. 그 해 5월 1일 1억9,500만원을 들여 시작한 야간 조명시설 공사가 끝나 시험 조명을 한 것이다. 그러나 대구 시민들이 눈부신 조명시설 아래서 야간 경기를 최초로 관람한 것은 7월 10일이었다. 삼미슈퍼스타즈를 상대로 후기리그 첫 경기를 치른 날이기도 했다. 삼성 선수들은 첫 야간 경기를 자축하듯 삼미의 마운드를 초토화시킨 끝에 엄청난 기록을 쏟아 놓으며 20 - 6으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프로야구 출범 2년째인 1983년 3월에는 낡은 전광판을 전자식으로 교체하고, 관중들이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스탠드에 의자를 설치했다. 그러나 협소한 관중석을 늘리기 위해 시즌이 끝난 9월 20일부터 1루와 3루쪽 스탠드 확장 공사에 들어가 착공 5개월 만인 1984년 2월 27일 완공했다. 또한 1986년 4월에는 방송시설 및 부대 시설을 대폭 개수, 경기 중간 중간에 흥겨운 음악을 틀어 관중들의 흥을 돋우기도 했다. 그러나 스탠드를 대대적으로 확장한 것은 1989년이었다. 1988년 11월 내야(1, 3루) 스탠드 증축과 전광판 보수 공사를 단행한 구단은 1989년 4월 14일 서울과 부산을 제외한 지방구장으로는 최대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내야 스탠드를 4단으로 증축하고 전 관중석 의자를 등받이 의자로 교체함으로써 1만3,000명의 관중이 안락한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야구를 관람할 수 있게 됐다.
1989년 4월에는 내야 스탠드를 4단으로 증축하고 전 관중석 의자를 등받이 의자로 교체함으로꺼 1만 3,000명의 관중이 편안하게 야구를 관람할 수 있게 했다.
특히 1995년에는 구장 개·보수에 53억여원을 들여 선수들이 경기력을 향상하고 수준 높은 경기를 펼칠 수 있게 했다. 그라운드 전체에 인조 잔디를 깔고 또한 야간 조명시설도 조도(照度)를 한껏 높여 대낮같이 밝은 조명 아래 경기를 펼칠 수 있게 한 것이다.잡음이 심했던 음향설비도 최신형으로 교체, 극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웅장한 원음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새로 설치한 음향설비는 컴퓨터로 제어되는 시뮬레이션 중앙 집중 방식의 최신 음향 장치로 원음의 재생이 가능해 경쾌한 타격음은 물론 음악까지 16개의 대형 스피커를 통해 입체적으로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관람석의 공간 확보를 위해 의자 수를 대폭 축소하고 의자도 등받이로 교체, 관중들이 보다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그러나 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국내 최초로 경기의 생동감과 현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교체한 멀티컬러전광판이다. 30여억원을 들여 가로 28m 규모로 제작한 이 멀티컬러전광판은 컴퓨터 그래픽 처리 기능과 운동장 내외야 5개소에 설치된 카메라가 잡은 영상을 화면으로 표출할 수 있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때문에 박진감 넘치는 경기의 장면 하나 하나를 생생하게 중계할 수 있어 관중들은 한 차원 높게 경기를 즐길 수 있게 됐다. 또한 매표소에도 미니 전광판을 설치, 잔표의 현황과 행사 및 경품 현황, 경기 안내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이렇듯 프로야구 출범 14년 만에 대구구장이 작으면서도 완벽한 구장, 전국 어느 구장과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최첨단 시설을 갖춘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1995년 성적은 종합 5위에 그쳤지만 관중 동원은 전국 최고였다. 4월 28일 OB와의 대구 개막 경기에 만원(1만3,000명)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홈에서 치른 63경기 중 30경기에서 만원을 이루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9월 20일 태평양전과 치른 대구 마지막 경기까지 시즌 최다 관중인 62만3,970명을 동원,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95년 8개 구단 중 처음으로 멀티컬러전광판을 선보여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삼성은 2002년 풀컬러 전광판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한차원 높아진 고화질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는 3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서울의 잠실구장, 부산의 사직구장을 제외한 지방 구장으로는 최다 입장관중으로 한 경기당 평균 9,904명이 관람한 셈이다. 1995년에 이어 2002 시즌을 맞이해서도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이 다시 이루어졌다. 보다 쾌적한 관람환경을 위해 총 40여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전면적인 개·보수를 실시함에 따라 관람객들은 더욱 편안해진 대구구장을 만날 수 있었다. 새롭게 단장한 곳은 전광판을 비롯해, 관중석, 인조잔디 교체, 화장실 등이다. 전광판은 1995년 당시 8개 구단 중 처음으로 멀티컬러전광판을 선보여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후 다른 구장에서 경쟁적으로 전광판을 교체하면서 다소 그 빛이 바랬다. 이에 따라 풀컬러 전광판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한차원 높아진 고화질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 더불어 관중석 의자를 접이식 의자로 교체, 고급화하여 극장에서와 같이 안락한 자세로 야구관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인조잔디를 교체하면서 선수들의 부상위험을 줄였으며, 원정 라커룸에도 에어컨을 설치하는 등 원정팀에 대해서도 많은 배려를 기울였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장애인들을 위한 편의시설로 5,000여만원의 별도 공사비를 들여 출입구 계단에 휠체어 리프트를 설치하고 장애인 관람석과 장애인 화장실을 별도 설치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새롭게 단장된 야구장으로 인해 팬들에게 즐거운 야구, 편안한 야구관람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을 마련해 준 것이다.
프로야구 출범은 지역 사회 야구 발전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대구·경북지역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어린이들에게는 삼성라이온즈가 선망의 대상이 됐다. 이를 반영하듯 1982년 삼성라이온즈가 탄생한 첫 해에 대구 중앙초등학교를 비롯해 5개 학교가 야구부를 창설, 꿈나무 육성에 들어가는 등 1989년까지 10개 학교에서 야구부를 운영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3개 중학과 2개 고교에서 야구부를 창설해 대구·경북야구뿐만 아니라 삼성야구의 디딤돌이 됐다.삼성은 1982년부터 각 학교에 야구 용품을 지원하고 야구부를 창설한 학교에는 지원금(초등교 100만원, 중학 150만원, 고교 200만원)을 보조하는 등 아마야구 육성지원에 정성을 기울였다. 1982년 1,500여만원으로 시작된 아마 육성지원금(창단 및 대회 출전 경비 포함) 등은 20년에 걸쳐 30여억원에 육박했다. 이같이 육성지원금이 늘어난 것은 1989년부터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야구 저변 확대에 발벗고 나서면서였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사례가 1989년 11월 4일 개최한 제1회 라이온즈기 쟁탈 사회인야구대회였다. 이 대회는 대구·경북지역 13개 사회인야구 팀이 참석, 대성황을 이뤄 시민들의 건전한 취미생활 유도와 시민 화합을 고취시키는 데 한 몫을 했다. 사회인야구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로 힘을 얻은 구단은 1990년 4월 22일부터 2개월간 초등학교 야구 기술지도를 실시,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올바른 야구기술 습득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6월 20일부터 2개월 동안 연고지 내 중·고교 투수들을 대상으로 ‘투수학교’를 운영한 뒤 여름방학 기간 중에는 어린이들에게 건전한 여가 선용과 야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여름야구교실’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아마야구 육성을 위한 기술 지도도 1992년부터 본격화, 3월 9일부터 5일간 LA 다저스 가이콘티 투수코치가 삼성실내연습장에서 대구·경북지역 투수와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피칭의 기본을 비롯해 투구 폼과 투구의 요령 등을 지도했다. 또한 12월 1일부터 5일간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조를 편성, 모교인 경북고, 대구고, 대구상고, 경주고, 포철공고를 방문해 후배들과 합동훈련으로 우의를 다지며 훈련 요령과 타격, 피칭에 따른 기술지도를 했다. 아마야구에 대한 기술지도와 ‘모교방문 합동훈련’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994년 12월에는 코치 6명, 선수 36명이 ‘모교방문 합동훈련’에 참가, 후배들과의 훈련이 뿌리를 내리게 됐다.
삼성라이온즈가 본격적으로 꿈나무 육성에 들어간 것은 1990년 9월 15일 ‘삼성리틀야구단’을 창단하면서였다. 뜻밖의 호응으로 대성황을 이룬 ‘어린이 여름야구교실’이 모태가 됐다. 초등학교 3~5학년이면 누구나 무료로 참가할 수 있었던 ‘여름야구교실’은 개최한 것만으로도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여름야구교실’은 야구를 이해시키는 데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이를 거울 삼아 선수를 꿈꾸는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기 위해 창단한 것이 ‘삼성리틀야구단’이었다. ‘삼성리틀야구단’은 1990년 9월 15일 25명의 선수를 단원으로 창단했다. 야구에 소질이 있거나 취미가 있어도 소속 학교에 야구부가 없어 선수로 발탁될 기회가 없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다. 야구에 재능이 있는 선수들을 조기에 발굴, 육성시켜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에 편입시키든가 중학교에 진학시켜 전문 야구선수로 육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여름야구교실’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더욱 활성화된 상태로 자리를 잡아갔다. 재능이 있는 어린이는 ‘삼성리틀야구단’에 입단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더욱 인기를 끌었다.‘삼성리틀야구단’은 8개 프로구단 가운데 유일하게 구단에서 운영하는 리틀야구팀이기도 하다. 또한 대외적으로도 활발하게 활동을 펴 지금까지 5회에 걸쳐 전국리틀야구대회(서울 장충구장)에서 기량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한 1993년 8월 24일에는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일본소년야구연맹 선발 팀과 친선경기를 펼쳐 갈채를 받기도 했다.
리틀야구단 운영 방침이 승부보다 진취적인 사고와 협동심 배양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전국 규모 대회에서의 우승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해마다 이름있는 선수들을 심심찮게 배출해 위상을 드높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선수가 이정호(李正鎬)와 강영식(姜永植)으로 이들은 모두 삼성야구의 꿈나무가 됐다. 특히 투수 이정호는 리틀야구 1호로 대구상고 재학시절 황금사자기(1998년)와 청룡기(1999년)에서 우승을 해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던 투수다. 강영식도 대구상고 재학 중 황금사자기(1998년)에서 우승한 좌완 투수로 2000년 해태에 입단했고, 2001년 3월에는 신동주와 트레이드되어 사자 품으로 돌아와 내일의 좌완 에이스를 꿈꾸고 있다. 리틀야구 운영으로 인한 효과도 만만치 않았다. 1990년 ‘삼성리틀야구단’이 창단했을 때만 해도 단 1개 팀도 없던 상태였다. 해가 거듭되고 리틀야구의 활약상이 돋보이자 YMCA 북부팀의 창단에 이어 1997년에는 YMCA 달서팀이 창단을 했다. 2001년에는 대구리틀과 안동물도팀이 창단되어 대구·경북지역 야구의 기초를 다지는 데 한 몫을 했다.
꿈나무 육성은 리틀야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어린이 여름야구교실’과 ‘삼성리틀야구단’ 운영으로 노하우를 축적한 구단은 아마야구의 활성화와 야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1992년 3월 28일 제1회 삼성기타기 중학야구대회에 이어 10월 20일에는 초등학교 야구대회를 창설했다. 당시 우승과 준우승 팀에게 피칭 머신 1대씩 4대를 시상품으로 걸고 치른 이 대회는 11개 초등학교와 9개 중학이 참가, 대구·경북지역 최고의 학생야구대회로 떠올랐다.1993년 제2회 대회부터는 초등학교와 중학대회를 통합, 고등학교까지 참가하는 초·중·고대회로 확대함으로써 최고의 권위와 인기 높은 대회로 탈바꿈하게 됐다. 11개 초등학교와 9개 중학교 및 5개 고교 등 25개 팀이 참가한 제2회 대회는 아마야구 육성 지원책의 일환으로 전 참가 학교에 볼 5박스를 지원한 것을 비롯, 상금으로 초등학교(우승 200만원, 준우승 150만원, 3위 50만원), 중학교(우승 300만원, 준우승 200만원, 3위 100만원), 고교(우승 400만원, 준우승 200만원)에 1,110만원을 수여하고 부상으로 알루미늄 배트를 지급했다. 또한 야구에 뛰어난 소질을 가진 선수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 3명씩 모두 9명에게 장학금으로 50만원(고교), 40만원(중학), 30만원(초등학교)을 지급했다. 특히 1994년 제3회 대회부터는 초·중·고 우승 팀을 4박5일 일정으로 일본에 파견, 일본 지역 초·중·고교 팀들과 기량을 겨룰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오사카(大阪)와 대구·경북지역의 야구 교류에 물꼬를 트기도 했다. 또한 1995년 9월 18일에는 제주지역의 아마 야구 활성화와 저변 확대 차원에서 제1회 삼성기 타기 야구대회를 창설, 제주도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도 했다.
연도 | 참가팀 | 시상 내역 | 우승팀 | 소요금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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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1회 | 20개 교 | 피칭머신 4대 | 내당초등, 경운중학 | 2,190만원 |
1993년/2회 | 25개 교 | 상금 1,110만원 | 수창초등, 경상중학, 경북고교 | 3,790만원 |
1994년/3회 | 25개 교 | 야구 용품 1,700만원 | 내당초등, 경운중학, 대구상고 | 4,200만원 |
1995년/4회 | 25개 교 | 상금 2,000만원 | 본리초등, 경운중학, 경주고교 | 9,100만원 |
1996년/5회 | 25개 교 | 상금 2,000만원 | 본리초등, 경상중학, 경주고교 | 8,000만원 |
1997년/6회 | 25개 교 | 상금 2,000만원 | 옥산초등, 대구중학, 경주고교 | 8,500만원 |
1998년/7회 | 25개 교 | 야구 용품 500만원 | 본리초등, 포철중학, 대구상고 | 3,200만원 |
1999년/8회 | 26개 교 | 야구 용품 500만원 | 율하초등, 대구중학, 경북고교 | 3,200만원 |
2000년/유보 | ||||
2001년/9회 | 27개 교 | 야구 용품 1,000만원 | 칠성초등, 성광중학, 대구상고 | 4,000만원 |
그러나 1997년 11월에 불어 닥친 IMF 사태로 구단 운영비 축소 방침에 따라 제3회 대회를 끝으로 1998년 제4회 대회는 무기 연기됐다. IMF 사태는 연고지인 대구·경북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1998년 제7회 대회의 규모를 축소시킨 뒤 2000년 제9회 대회는 유보되는 사태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어려운 때일수록 어린이들에게는 진취적인 기상을, 청소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어야 한다”는 신필렬 사장의 지시로 대회를 부활시켰다.삼성기 타기 대회는 10년간 지역은 물론 국가 야구 발전에 음으로 양으로 큰 흔적을 남겼다. 또 많은 선수들을 배출함으로써 야구 활성화에 초석이 되기도 했다. 현재 삼성라이온즈에서 활약하고 있는 배영수(裵英洙)를 비롯해 김수관(金秀官), 이승엽(李承燁), 이정호(李正鎬), 김진웅(金珍雄), 김승관(金承管), 하춘동(河春東)은 삼성기가 배출한 선수들이었다. 배영수는 1993년 칠성초등학교를 준우승시킨 타격왕이었고 1999년 경북고를 우승시킨 투수로 우수투수상을 받아 그 해 11월 8일 신인 1차지명선수로 계약금 2억5,000만원에 입단했다. 이 계약금은 삼성에 입단한 고졸 투수 최고액이기도 했다. 김수관은 1993년 경북고를 우승시켜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반면 이승엽은 타격왕에 올랐다. 삼성 리틀야구 출신인 이정호는 초등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1994년 내당초등학교를 우승시켜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뒤 대구상고 2학년 때인 1999년 준우승으로 감투상을 받았다. 특히 이정호는 2000년 6월 15일 계약금 5억3,000만원에 입단, 기량을 떠나 1999년 배영수가 세운 고졸 투수 역대 최고액(2억5,000만원) 계약금을 1년 만에 깬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진웅도 일찍부터 미완의 대기로 주목을 받았다. 1994년 경운중을 우승시킨 투수로 우수투수상을 받은 바 있고, 1997년 10월 27일 실시한 ’98신인 2차지명에서 우선지명을 받아 계약금 2억4,000만원에 입단한 유망주이다.김승관은 1994년 제3회 대회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고교선수였다. 대구상고를 우승시켜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던 김승관은 연고지명선수로 계약금 9,500만원에 입단했다. 하춘동은 제4회 대회(1995년)에서 빠른 발(도루상)과 만만치 않은 타격 솜씨(타격 2위상)로 주목을 끌어 1996년 8,000만원에 입단했다.
꿈나무 발굴을 위한 신인 공개 테스트는 매년 한국야구위원회가 실시하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탈락한 선수들이나 무명 선수들에게는 프로야구 선수로 입신할 수 있는 등용문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까다로운 기량 테스트를 거쳐야 하는 등 엄격한 심사가 뒤따랐다. 또 관문을 통과해도 연습선수란 신분으로 2군에 피땀나는 훈련을 해야만 다음 해에 1군에 오를 수 있다. 이들 가운데는 고교나 대학시절 명성을 날린 선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자기와의 싸움에서 실패, 중도에서 포기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1992년에 입단한 박광율(朴光律)은 경남고와 연세대에서 이름을 날린 선수로 고교 재학 중에는 청소년대표로 뽑혀 1988년 제8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12월 호주)에 출전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고질적인 팔꿈치 부상으로 1경기 출전 후 은퇴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연습선수의 굴레를 벗고 성공한 선수도 있었다. 외야수 최익성(崔益誠)과 투수 박석진(朴石鎭)이다. 최익성은 1994년 연습선수로는 파격적인 계약금 1,500만원에 입단, 그 해 2군 남부리그에서 타율 0.385로 타격왕에 올라 성공시대를 예감했다. 그러나 고질적인 허리부상과 손목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1996년 백인천 감독에 의해 1군에 픽업된 최익성은 57경기에서 타율 0.252를 기록, 합격점을 받아 주전으로의 가능성을 내보였다. 놀라운 것은 1997 시즌이었다. 122경기에서 타율 0.296을 기록하며 홈런도 22개를 날려 입단 4년 만에 주전으로 자리를 굳히기도 했다. 하지만 1998 시즌 허리와 손목 부상을 무릅쓰고 110경기에 출전했으나 타율 0.262에 홈런은 15개를 날리는 데 그쳤다. 시즌이 끝난 11월 3일 한화의 투수였던 노장진과 트레이드된 것도 실력보다 고질적인 부상 때문이었다. 최익성 이상으로 성공한 선수가 1995년 테스트 끝에 계약금 없이 입단한 투수 박석진이다. 하지만 박석진은 삼성에 머문 3년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투수였다. 1995 시즌에 올린 4승(6패)이 최다승이었다. 그렇다고 해가 거듭될수록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1996 시즌에는 2승(2패)2세이브, 1997 시즌에는 1승(4패)으로 주저앉아 롯데 투수 박동희와 트레이드 됐다. 강속구를 자랑하는 박동희를 제5 선발 겸 큰 경기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99 시즌 박석진은 11승(3패)2세이브로 일약 롯데의 에이스로 발돋움했다. 프로 데뷔 5년 만에 일가를 이룬 것이다.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꿈나무로 큰 기대를 걸고 있는 투수가 문남열(文南烈)이다. 문남열도 1997년 테스트를 통해 계약금 없이 입단했다. 성적은 1999 시즌 29경기에서 올린 2승1패(방어율 6.86)가 전부다. 시즌이 끝난 뒤 군 팀 상무에 입대한 탓이다. 2000 시즌 상무에서의 활약은 눈부실 정도였다. 전국실업선수권을 비롯해 대통령배 실업리그(하계 및 추계)에서 우승을 뽑아 우수투수상을 차지한 뒤 2001 시즌에는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영광을 안았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에 패해 첫 우승의 꿈을 날려버린 삼성은 신인 육성과 선수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2군 운영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이에 따라 박창룡(朴昌龍) 대구 경운중 감독을 2군 감독으로 영입한 뒤 1984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천보성을 2군 타격 및 수비코치로 기용, 본격적인 신인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2군의 필요성은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수의 공급이 풍부한 삼성이나 OB를 제외한 4개 구단은 2군 운영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2군이 경기를 치를 수 있는 하나의 팀으로 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84년이었다. 5월 25일 OB의 이천 연습구장에서 한국야구위원회 서종철(徐鐘喆) 총재가 참석한 가운데 OB-삼미의 2군 경기가 최초로 벌어졌다. 그러나 1985년으로 접어들면서 늘어나는 적자 폭을 최소화하기 위해 예비 전력인 2군 선수를 축소하면서 활동도 자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삼성은 프로야구의 발전과 우수 선수 확보 차원에서 2군의 필요성을 인식, 1986년 2월 2군을 집중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경산 훈련장을 착공했다. 또한 1987년 5월 16일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본 경기에 앞서 삼성-OB의 2군 경기를 선보여 2군 활성화에 박차를 가했다. 삼성과 OB는 이 경기를 시작으로 7월 12일까지 이천, 경산, 잠실, 대구 등지에서 8차례 2군 경기를 가져 전승을 거두는 전적을 남겼다. 7월 18일부터는 빙그레까지 동참, 8월 9일까지 대구, 대전을 오가며 2군 경기를 치르자 MBC도 뒤늦게 합류, 9월 3일 잠실서 OB와 첫 경기를 가진 뒤 빙그레와 교환경기를 치러 2군 경기 활성화에 물꼬를 텄다.
1990년 쌍방울이 제8구단을 창단, 2군리그에 참가 하면서 북부리그(LG, OB, 한화, 태평양)와 남부리그 (삼성, 해태, 롯데, 쌍방울)로 나뉜 2군 공식경기가 빛을 보게 됐다. 1990년 2군 경기모습.
2군 경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한국야구위원회는 1988년 공식 경기로 지방 소도시를 순회하며 팀당 30경기를 치르는 방안을 내놓아 4월 30일 동대문(롯데 - 빙그레)과 이천(OB - 태평양)에서 막이 올랐다. 그러나 해태는 선수와 코칭스태프의 확보의 어려움으로 불참, 6개 구단이 총 90경기를 치르기로 했다. 하지만 8월 28일 2군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치른 경기는 총 31경기에 불과했다. 몇몇 구단을 제외하고는 2군을 정식으로 편성하지 않아 선수가 부족한 게 원인이었다. 대부분의 구단들은 2군 경기에 잉여 선수나 부상을 당한 뒤 회복을 기다리는 선수들을 투입해 왔다. 하지만 1990년 쌍방울이 제8구단을 창단, 2군리그에 참가하면서 활기를 띠어 북부리그(LG, OB, 한화, 태평양)와 남부리그(삼성, 해태, 롯데, 쌍방울)로 나누어 공식경기가 빛을 보게 됐다. 삼성은 1990년부터 신인 발굴에 발벗고 나섰다. 타 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지 못한 무명 선수들을 영입하는 한편 매년 11월 초에 실시한 신인 공개 테스트를 통해 연습 선수를 받아들여 꿈나무로 자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1990년 2군 코칭스태프를 대폭 강화, 박창룡(2군 감독), 천보성(수비) 외에 김광웅(金光雄·타격), 김명성(金明成·투수), 함학수(咸學洙·타격) 외에 미국인 투수 인스트럭터인 마티를 코치로 기용했다. 이는 야구의 저변 확대와 유망 선수 발굴 및 체계적인 선수 관리 등을 목적으로 재활군 체제 도입을 위한 정지 작업이기도 했다. 재활군은 1군에서 부상당했거나 컨디션 난조로 2군에 내려온 선수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컨디션 조절과 체력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또 실전에 참가하지 못하는 연습 선수도 3군에 편입시켜 나름대로 특성에 맞는 훈련을 실시했다. 이를 위해 타 구단의 지명에서 제외된 연고지역 유망주 10여명을 입단시켜 꿈나무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투수 이상목(李相睦), 김인철(金寅哲), 내야수 정경훈(鄭京勳)이 빛을 보게 되었고 1991년 입단한 선수들 가운데 외야수 신동주(申東宙), 전상렬(全商烈)이 주목을 받았다. 또 1992년 입단한 선수 가운데 이동수(李東洙)라는 걸물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동수는 계약금 800만원에 입단한 선수였지만 1995년 최우수신인선수로 선정돼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