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로 부터 사랑받는 팀, 근성있고 호쾌한 야구를 하는 팀!
프로야구처럼 기록을 중요하게 보존하는 경기도 없다. 때문에 팀은 물론 선수 개개인이 기록 하나 하나에 운명을 걸기도 한다. 명문 팀이나 명선수 탄생에 기초적인 요건이 되기 때문이다. 삼성라이온즈가 명문 구단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프로야구 출범 20년간 삼성은 숱한 기록을 쏟아내며 스타들을 배출했다. 물론 그 뒤에는 구단의 헌신적인 지원이 뒤따랐다. 프로야구 개막을 알리는 첫 경기가 좋은 예였다. 개막 경기 개최지가 서울로 확정되자 구단 실무를 맡았던 김동영 이사가 발벗고 나섰다. 개막 경기에 출전한다는 명예도 중요했다. 그러나 기록을 염두에 두었다. 개막 경기 그 자체가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MBC청룡과의 프로야구 개막 경기에서 첫 패배라는 불명예를 안았지만 이만수가 한국 프로야구 첫 안타, 첫 타점, 첫 홈런의 주인공이 됐다. 이선희는 첫 구원 투수로 첫 만루홈런을 내줘 첫 패배의 아픔을 안았다. 그러나 이들은 프로야구 발전에 밑거름이 됐다.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이들의 영광과 좌절을 반추하는 것도 기록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팀 타율은 0.266으로 OB베어스(0.283)와 MBC청룡(0.282)에는 뒤졌으나 삼미슈퍼스타즈를 상대로 6월 12일 부산 구덕구장에서 팀 최다 타석(57)에 팀 최다 안타(27)와 1회 최다 안타(9)를 기록하며 팀 최다 득점(20)을 올렸다. 또한 7월 10일 대구에서 벌어진 삼미전에서 6개의 홈런을 터트리며 20점을 뽑아 팀 최다 홈런에 팀 최다 타점을 동시에 기록했다.
1983. 4. 9 삼성 - OB 1차전/대구구장/10-6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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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1회 말 공격 ① 2번타자 오대석 좌월 2루타 ③ 4번타자 장효조 중전 안타 ⑤ 6번타자 이만수 우중월 2루타 ⑦ 8번타자 박 찬 좌전안타 |
② 3번타자 김한근 좌전 안타 ④ 5번타자 박승호 우전 안타 ⑥ 7번타자 천보성 중전 안타 ⑧ 9번타자 김근석 좌전 안타 |
OB선방 - 선우대영, 구원 = 정선두 |
1983년에 세운 팀 최다 연속 안타(8)도 프로야구에서 최초로 세운 기록이었다. 4월 9일 OB(대구)와의 시즌 첫 경기에서 1회 말 선두 타자 장태수(張泰洙)가 삼진을 당한 뒤 오대석(吳大錫·좌월 2루타), 김한근(金漢根·좌전 안타), 장효조(張孝祚·중전 안타), 박승호(朴承浩·우전 안타), 이만수(李萬洙·우중월 2루타), 천보성(千普成·중전 안타), 박찬(朴燦·좌전 안타), 김근석(金瑾錫·좌전 안타) 등 8명의 타자가 선우대영(鮮于大泳), 정선두(鄭善斗)를 상대로 8 연속 안타를 터트리는 데 성공했다. 이 기록은 해태(1984년), OB (1985년), 현대(1999년)가 도전했으나 실패, 20년이 된 지금까지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 6월 1일 대구 OB전에서 김근석과 오대석이 포문을 연 8연속 경기 홈런은 6월 13일 이만수(대구 삼미전)의 홈런으로 막이 내렸다. 8경기를 치르는 동안 10명의 타자들이 무려 16개의 홈런을 날려 ‘거포군단’의 막강한 화력을 과시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했던 기록이었지만 이 기록도 1997년 삼성에 의해 16경기 연속홈런으로 늘어났다. 또한 6월 1일 대구에서 벌어진 OB와의 경기에서 프로야구 최초로 1,000안타와 1,500루타를 돌파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프로야구 사상 전무후무한 ‘통합 우승’을 엮어낸 1985년에는 기별 최고 승률(0.741) 및 시즌 최고 승률(0.706)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이 같은 기록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전기리그에서 프로야구 최초이자 팀 최초인 11연승(4월 12일∼27일)을 업고 55경기에서 40승1무14패를 올린 때문이었다. 연승은 후기리그에서도 엮어냈다. 그것도 전기리그에서 세운 11연승을 깬 13연승(8월 25일∼9월 17일)이었다. 후기리그에서 13연승을 발판 삼아 37승18패(승률 0.673)를 올려 전·후기리그 110경기에서 77승1무32패의 성적을 올려 시즌 최다 승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위치 | 선수 | 타수 | 득점 | 안타 | 타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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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 허규옥 | 5 | 2 | 3 | 2 |
(左) | 홍승규 | 3 | 2 | 2 | 1 |
左 | 장태수 | 2 | 1 | 2 | 1 |
(右) | 장효조 | 4 | 1 | 2 | 1 |
走·一 | 함학수 | 2 | 2 | 1 | 2 |
(指) | 이만수 | 4 | 1 | 2 | 1 |
打 | 홍순호 | 1 | 0 | 0 | 0 |
(一) | 박승호 | 2 | 1 | 1 | 2 |
一 | 이종두 | 3 | 1 | 1 | 0 |
(二) | 김성래 | 3 | 1 | 1 | 0 |
二 | 배대웅 | 2 | 1 | 1 | 0 |
(三) | 김용국 | 5 | 1 | 2 | 4 |
(遊) | 오대석 | 5 | 1 | 1 | 0 |
(捕) | 송일수 | 5 | 1 | 2 | 2 |
9월 15일에는 광주 해태전에서 문희수(文熙秀), 김용남(金勇男), 김기철(金琪哲)을 상대로 21안타를 터트린 끝에 16점을 뽑아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선발 타자 전원 안타·전원 득점 기록을 동시에 수립했다. 이 기록을 세우기 전까지 전원 득점경기는 1983년 삼미가 롯데를 상대로 1차례, 1984년에는 롯데가 삼성에게 1차례 있었으나 선발 타자 전원이 안타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삼성이 가지고 있는 기록 가운데 가장 값진 기록은 1986년에 세운 팀 연승기록이다. 5월 27일 대구 OB전에서 4-0 완봉 승으로 연승 테이프를 끊어 6월 14일 잠실 MBC전에서 5 - 1로 승리하기까지 16연승이라는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며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시켰다. 이 기록은 1985 시즌에 세운 13연승을 깬 프로야구 불멸의 기록으로 살아 있다. 16연승의 밑거름이 된 투수는 갓 입단한 성준(成埈·5승)과 권영호(3승3세이브)였고 타자로는 허규옥 이었다. 허규옥은 5경기에서 승리 타점을 터트려 16연승을 가능케 했다. 또한 이 해 뜻깊은 기록도 나왔다. 7개 구단 가운데 가장 먼저 2,000득점(5월 15일 빙그레전)과 4,000안타(6월 12일 해태전) 및 2,000타점(7월 15일)을 터트린 끝에 9월 12일 청보 (인천)를 5 - 2로 꺾어 300승 고지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연승 | 날짜 | 장소 | 상대 | 점수 | 투수 | 승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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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05.27 | 대구 | OB | 4-0 | 권영호 | 배대웅 |
2 | 05.28 | 대구 | OB | 5-3 | 성 준 | 이만수 |
3 | 05.29 | 인천 | 청보 | 8-4 | 김시진 | 허규옥 |
4 | 05.30 | 인천 | 청보 | 12-1 | 진동한 | 장효조 |
5 | 05.31 | 부산 | 롯데 | 3-2 | 권영호 | 허규옥 |
6 | 06.01 | 부산 | 롯데 | 5-1 | 성 준 | 이해창 |
7 | 06.03 | 잠실 | OB | 5-2 | 김시진 | 허규옥 |
8 | 06.04 | 잠실 | OB | 3-0 | 성준 | 이종두 |
9 | 06.06 | 대구 | 청보 | 11-2 | 진동한 | 이만수 |
10 | 06.06 | 대구 | 청보 | 3-1 | 김시진 | 이만수 |
11 | 06.07 | 대구 | OB | 4-0 | 양일환 | 장태수 |
12 | 06.08 | 대구 | 롯데 | 3-2 | 성 준 | 박승호 |
13 | 06.08 | 대구 | 롯데 | 6-4 | 권영호 | 이종두 |
14 | 06.10 | 대전 | 빙그레 | 5-2 | 양일환 | 허규옥 |
15 | 06.12 | 광주 | 해태 | 4-1 | 진동한 | 허규옥 |
16 | 06.14 | 잠실 | MBC | 5-1 | 성준 | 최무영 |
김영덕 감독의 뒤를 이어 지휘봉을 잡은 박영길 감독은 1987년 전기리그 33승21패, 후기리그 31승23패로 1985 시즌에 이어 사상 두번째로 전·후기리그를 제패해 공격야구를 꽃피웠다. 이보다 놀라운 것은 ‘시즌 최고 타율(0.300)’ 및 ‘시즌 최고 장타율(0.444)’과 ‘시즌 최고 출루율(0.367)’의 경신이었다. 지금까지 ‘시즌 최고 타율’은 OB가 1982 시즌 세운 0.283이었고 ‘시즌 최고 장타율’과 ‘시즌 최고 출루율’은 1985 시즌 김영덕 감독이 세운 0.417(장타율)과 0.357(출루율)이었다. 박영길 감독이 3할이라는 높은 타율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대량 득점을 노리는 공격야구를 펼친 때문이었다.
22명의 타자들이 출전했던 공식 경기에서 7명의 타자들이 규정타석을 채워 이 가운데 장효조(0.387)를 비롯, 이만수(0.344), 김성래(0.332), 허규옥(0.326) 등이 3할대를 마크했다. 또 규정타석에 미달한 오대석(0.326). 김동재(0.318)도 한몫을 거들어 시즌 최다 안타(1,120·경기 당 평균 10.4개)와 최다 득점(583·평균 5.4점) 및 최다 타점(548·평균 5.07점) 등 11개의 신기록을 뽑으며 3할의 타율을 달성할 수 있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시즌 팀 최다 홈런 경신이었다. 해태가 1985, 1986 시즌 달성했던 99개의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105홈런으로 끌어 올려 프로야구에 ‘한 시즌 세 자리 홈런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이는 홈런왕 타이틀을 처음 움켜잡은 김성래가 22개를 쏘아올린 것을 비롯해 이만수(18개), 이종두(10개) 등이 두 자리 숫자를 보탰으며 22명의 타자들 가운데 16명이 최소한 1개 이상의 홈런을 날린 때문이었다. 1987년에는 개인 타이틀에서도 대풍을 맞았다. 타이틀 13개 가운데 최우수선 수(장효조)를 비롯한 최다승(23승·김시진), 수위타자(0.387·장효조), 최다홈런 (22개·김성래), 최다 타점(76·이만수), 최고 출루율(0.461·장효조), 최고 장타율 (0.579·장효조) 등 7개 부문을 휩쓸어 명문 구단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였다.
또한 홍승규는 4월 7일 대구에서 벌어진 MBC전에서 4회말 김태원을 상대로 프로야구 통산 2,000홈런을 날렸으며 류중일은 5월 10일 인천 청보전부터 5월 14일 잠실 MBC전까지 11연속 타수 안타를 기록했다. 또 하나 값진 수확은 1985년 8월 25일부터 시작된 ‘인천 원정경기 14연승’이다. 1985 시즌 인천 원정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후 1986 시즌 9연승으로 총 10연승을 마크했으며, 1987 시즌 전기리그에서 4연승을 추가함으로써 14연승(1985년 8월 25일∼1987년 6월 18일)이라는 ‘특정 구장 최다 연승’ 기록을 남겼다. 1990년 8월 8일에는 신인 이태일(李太逸)이 롯데(부산 사직)를 상대로 프로야구 6번째이자 팀 사상 최초로 노히트노런(No Hit No Run)의 대기록을 작성했다. 이어 8월 28일 대구 경기(태평양전)에서 이만수가 연타석 홈런을 포함, 3타수 3안타 3타점을 올리는 등 21안타를 터트린 끝에 국내 최초로 선발 타자 전원 안타·득점·타점 경기를 엮어냈다. 2회 말 11타자가 연속 7안타(볼넷 1)로 8점을 뽑아 전원 득점을 달성한 뒤 4회 말에는 선발타자로 유일하게 타점을 올리지 못했던 이현택(李弦澤)이 솔로 홈런을 터트려 전원 타점을 달성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1999 시즌 현대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9년간 어느 팀도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이었다. 이 밖에도 프로야구 첫 번째로 팀 통산 200세이브(1990년 5월 15일 대구 롯데전)와 8,000안타(5월 26일 대전 빙그레전)를 날려 500승(6월 3일 대구 빙그레전) 고지에 올랐다. 이어 프로야구 최초로 4,000타점(7월 4일 대구 태평양전)을 기록했고, 800홈런(9월 2일 대구 롯데전 )까지 달성했다.
프로야구 출범 10주년을 맞은 1991년 팀 성적이 70승1무55패(승률 0.560)로 3위에 머문 데 이어 1992년에는 67승2무57패(승률 0.540)로 4위로 처져 실망을 안겼다. 그러나 신인 투수 오봉옥(吳奉玉)이 프로야구사에 영원히 기록될 금자탑을 세워 위상을 높였다. 구원 전문투수인 오봉옥이 38경기에서 13연승무패2세이브(방어율 3.55)로 프로야구 사상 첫 승률 100%라는 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이후 승률 100%는 아무도 근접하지 못한 대기록이었으나, 2002년 삼성의 김현욱이 10승무패로 프로통산 2번째로 승률 100%를 달성, 삼성 선수 2명만이 승률 100%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오봉옥의 13연승은 김성근 감독의 주도 면밀한 기용과 승운이 맞아떨어진 행운의 승리이기도 했다. 오봉옥은 1992년 4월 28일 대구 쌍방울전에서 0-1으로 리드 당하고 있던 7회 초 구원으로 등판, 8회 말 팀 타선의 폭발로 2점을 뽑아 불과 1과⅔이닝을 던진 끝에 데뷔 첫 승을 챙기는 행운을 누렸다. 오봉옥의 행운은 이틀 뒤(4월 30일) 쌍방울전(대구)에서도 찾아왔다. 1 - 2로 리드 당하던 9회 초에 등판, ⅓이닝을 던졌으나 9회 말 팀이 2점을 뽑아 구원승을 올렸다. 오봉옥이 올린 13연승 가운데 11승이 구원승이었고 선발로 완투한 끝에 얻은 승리는 2승에 불과했다. 그것도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운 뒤인 9월 4일 쌍방울전(대구)서 완투한 끝에 12 - 6으로 이겨 첫 완투승을 따냈고 9월 10일 OB전(대구)에서는 5 - 0으로 첫 완봉승을 거둬 김성근 감독이 억지로 만들어 준 승수가 아님을 입증했다.
오봉옥의 13연승은 1982년 박철순이 세운 22연승에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삼성 투수로는 김시진의 16연승(1984년 9월 13일∼1985년 7월 8일), 김일융의 14연승(1985년 9월 12일∼1986년 5월 3일)에 이어 3번째이자 프로야구 4번째 기록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 시즌 연승으로는 박철순(1982년 22연승), 김시진(1985년 15연승)에 이어 3번째 기록이다. 김일융은 두 시즌에 걸쳐 14연승을 했지만 한 시즌 최다 연승은 1986년 8연승에 불과했다.
1992년 신인 구원 전문투수 오봉옥이 13연승무패2세이브(방어율 3.55)로 프로야구 사상 첫 승률 100%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1993년에는 시즌 팀 최다 안타(1,154)는 물론 타점 (583)에서도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김성래가 장효조 이후 6년 만에 3번째로 MVP의 영광을 안았으며 신인 왕은 수위타자로 최고 장타율과 최고 출루율을 석권한 양준혁이 움켜쥐었다. 사진은 홈런을 치고 들어오는 양준혁
오봉옥의 승률 100% 달성 외에도 팀은 획기적인 기록들을 최초로 달성, 명문 구단으로서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프로야구 원년 개막경기에서 이만수가 1호를 기록한 안타, 타점, 홈런 등이 11년 만에 1만 안타와 5,000타점 및 1,000홈런으로 불어난 것이다. 프로야구 최초인 팀 통산 1만 안타는 1992년 4월 19일 OB와의 연속경기 1차전(대구)에서 김용국이 강병규(姜炳圭)를 두들겨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1982년 3월 27일 MBC와의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이만수가 첫 안타를 터트린 이후 1,091경기에서 11년 23일 만에 1만 안타의 고지에 오른 것이다. 프로야구 개막전의 첫 안타가 말해주듯 안타에 관한 한 항상 선두에서 프로야구를 이끌었다. 1만 안타를 향한 첫 징검다리인 1,000안타는 1983년 6월 5일 인천 삼미전에서 6개 구단 중 가장 먼저 정현발이 성공시켰다. 4년 뒤인 1987년 6월 27일에는 대구 롯데전에서 프로야구 첫 안타의 주인공 이만수가 마침내 5,000안타를 터트려 1만 안타를 향한 관문을 통과했다. 프로야구 최초인 5,000타점은 1992년 5월 9일 잠실 OB전에서 프로야구 원년 첫 타점의 주인공 이만수가 구동우(丘東宇)로부터 빼앗아 또 다른 감격을 안겼다. 원년 이후 1,108경기 만에 맞은 경사였다. 그러나 1,000홈런은 해태의 뒤를 이어 7월 26일 광주 해태전에서 이만수가 터트렸다. 5월 31일 프로야구 최초로 1,000홈런 고지에 오른 해태보다 1개월 26일이 늦어 빛을 잃었다. 하지만 1993년은 ‘제2의 황금기’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공격력을 앞세워 기록 행진을 계속하며 개인 타이틀을 대량으로 이끌어 냈다. 1993년 첫 수확은 5월 11일 프로야구 최초로 달성한 팀 통산 300세이브와 6,000득점이었다. 태평양과 맞붙은 대구경기에서 8회 말 강기웅(姜起雄)을 홈에 불러 들여 6,000득점의 이정표를 세운 뒤 9회 말 오봉옥이 세이브를 성공시켜 300세이브를 달성했다
연승 | 날짜 | 상대팀 | 장소 | 구분 | 이닝 |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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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04.28 | 쌍방울 | 대구 | 구원 | 1 2/3 | 2-1 |
2 | 04.30 | 쌍방울 | 대구 | 구원 | 1/3 | 3-2 |
3 | 05.06 | 롯데 | 대구 | 구원 | 1/3 | 8-7 |
4 | 05.09 | OB | 잠실 | 구원 | 3 | 4-1 |
5 | 05.23 | 롯데 | 사직 | 구원 | 4 | 18-14 |
6 | 06.09 | 쌍방울 | 전주 | 구원 | 4 1/3 | 5-4 |
7 | 07.04 | 태평양 | 대구 | 구원 | 7 1/3 | 6-4 |
8 | 07.09 | 쌍방울 | 전주 | 구원 | 3 2/3 | 6-5 |
9 | 08.22 | 해태 | 대구 | 구원 | 4 | 12-9 |
10 | 08.29 | 태평양 | 인천 | 구원 | 6 | 10-8 |
11 | 09.04 | 쌍방울 | 대구 | 완투 | 9 | 12-6 |
12 | 09.10 | OB | 대구 | 완봉 | 9 | 5-0 |
13 | 09.16 | 태평양 | 대구 | 구원 | 4 2/3 | 11-6 |
또한 5월 26일에는 태평양과의 연속경기 1차전(대구)에서 장·단 16안타를 터트린 끝에 11-4로 이겨 1,242경기 만에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팀 통산 700승 고지에 올랐다. ‘한 경기 팀 최다 홈런 기록’을 세운 것은 8월 7일 대구 해태전에서였다. 종전까지의 기록은 1992 시즌 빙그레가 전주 경기(쌍방울전)에서 세운 7홈런이었다. 4명의 타자들이 7개의 홈런을 터트린 것이다. 그러나 삼성은 류중일(柳仲逸), 동봉철( ), 양준혁(梁埈赫), 강기웅(姜起雄), 정영규(鄭榮圭), 이종두, 윤용하(尹用夏), 김성현(金成炫), 정경훈(鄭京勳) 등 9명의 타자들이 9개의 홈런을 터트려 ‘한 경기 팀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다.
삼성은 1990 시즌까지만 해도 통산 813개의 홈런으로 796개를 날린 해태를 리드해 왔다. 그러나 1991 시즌에서 역전 당해 1992 시즌 1,045개로 1,078개인 해태에 33개 뒤졌었다. 하지만 1993년 133개의 홈런을 뽑아 통산 홈런 1,178개(해태 1,173개)로 해태를 5개 차로 따돌리면서 선두에 복귀했다. 오랜 부상에서 재기한 김성래와 신인 양준혁의 합류로 공격력이 살아난 때문이었다. 1993년에는 시즌 팀 최다 안타(1,154)는 물론 타점(583)에서도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안타에 서는 2위 LG(1,069) 보다 85개를 더 날렸고 타점에서는 해태(465)보다 무려 118점이나 더 뽑았다. 이 같은 공격력은 개인 타이틀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투수부문에서는 김상엽(金相燁)이 탈삼진 170개를 기록, 신설된 최다 탈삼진 타이틀만을 거머쥐었지만 공격부문에서는 최우수선수 외에 삼성야구 사상 최초로 신인왕을 탄생시켰다. 최우수선수는 홈런왕(28개)과 타점왕(91점)에 오른 김성래가 차지, 1987년 장효조 이후 6년 만에 3번째로 MVP의 영광을 안았다. 신인왕은 수위타자(0.341)로 최고 장타율(0.598)과 최고 출루율(0.436)을 석권한 양준혁이 움켜쥐었다. 양준혁은 삼성야구 12년 만에 최초로 탄생한 신인왕이었다.
최고의 명문 구단 삼성에게도 최악의 해는 존재했다. 그것도 3년 연속 불황의 늪에 빠졌다. 1994년은 불황의 서막을 알린 해였다. 팀 성적 60승2무64패(승률 0.484·5위)가 말해주듯 개인 타이틀에서도 흉작을 면치 못했다. 양준혁이 유일하게 최다 타점(87)으로 왕위에 올라 체면을 지켰다. 1995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률은 상승했으나 60승6무60패로 5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서 김상엽이 올린 17승7패(방어율 2.30)는 큰 수확이었다. 비록 20승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1987년 김시진(23승6패) 이후 최다승을 기록, 선발 투수의 자리를 확실하게 굳혔기 때문이었다. 개인 타이틀은 전무했지만 그래도 이동수(李東洙)가 삼성야구 사상 2번째로 신인왕에 올라 위안이 됐다. 1996년은 삼성야구 최악의 해였다. 팀 성적 54승5무67패(승률 0.448)로 6위를 했다. 삼성야구 15년 사상 가장 저조한 성적을 냈다. 근성 있는 야구를 표방하며 지휘봉을 잡았던 백인천 감독에게는 일대 위기였다. 에이스인 김상엽의 허리 부상과 기대주 김태한의 부진이 위기를 자초한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김상엽은 3승1패1세이브, 김태한은 4승7패1세이브에 그쳤다. 단 한 명의 10승 투수가 없는 가운데 9승(5패5세이브)을 올린 신인 최재호(崔在皓)가 최다승 투수가 됐다. 방위 복무로 5월에 합류한 박충식(朴衷湜)은 8승2패12세이브(방어율 2.01)로 팀 최다 구원 투수가 됐다. 팀 방어율은 더욱 비참했다. 4.23으로 8개 구단 가운데 최하위였다.
하지만 이들은 팀 통산 900승과 팀 통산 400세이브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최재호는 6월 11일 OB전(대구)에 선발로 등판, 데뷔 이후 13경기 무패(6승1세이브)로 승리를 챙겨 팀을 900승 고지에 올려 놓았다. 박충식은 8월 22일 LG전(잠실)에서 8회 말에 전병호(田炳浩)를 구원등판, 3 - 0으로 승리를 지켜 팀 통산 400세이브에 성공했다. 이에 비해 타력은 0.249(3위)로 체면을 지켰다. 양준혁 홀로 뛰었다고 할 만큼 대단한 솜씨를 발휘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그가 1982년 오대석 이후 15년 만에 팀 사상 2번째(프로 통산 8번째)로 수립한 사이클링 히트였다. 8월 23일 대구 현대전에서 최창호(崔敞皓), 최원호(崔元豪), 김익재(金益宰)를 차례로 두들겨 2루타(1회), 3루타(4회), 단타(6회), 홈런(7회)으로 타자 최고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또 양준혁은 홈런 28개, 도루 23개를 기록, 삼성 선수로는 최초로 20 - 20클럽에 가입하며 수위타자(0.346)와 최다 안타(151), 장타율(0.624)부문을 휩쓸어 공격 3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함께 누렸다.
1997년은 삼성 특유의 공격야구가 꽃피기 시작한 해였다. 백인천 감독의 강도 높은 훈련과 과감한 신·구 세대 교체가 성공, 4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감격을 누렸다. 팀 성적은 66승7무53패로 4위에 그쳤지만 팀 타율 1위(0.277)에 시즌 최다 홈런(165)과 시즌 최다 타점(669)을 경신하는 막강한 공격력을 과시했다. 이와 함께 이승엽이 완벽한 타자로 성장, 최다 홈런(32), 최다 타점(114), 최다 안타(170)를 휩쓸며 최우수선수에 뽑히기도 했다. 또한 꿈나무로 테스트 끝에 입단한 신동주(1990년 12월)와 최익성(1994년 1월)이 주전으로 자리를 잡아 삼성야구의 미래를 밝게 했다. 백인천 감독의 공격야구가 진수를 보인 경기는 5월 4일 대구에서 벌어진 LG전이었다. 1회 말 첫 공격부터 소나기 홈런을 퍼부어 8회 말까지 정경배의 프로야구 첫 연타석 만루홈런과 최익성, 류중일의 연속타자 홈런, 김태균의 3점 홈런 2발 등 9개의 홈런을 터트린 끝에 27 - 5로 승리를 낚아 무더기로 신기록을 쏟아냈다. 1993년 8월 7일 대구 해태전에서 기록한 ‘한 경기 팀 최다 홈런’을 또 한번 작성한 것 외에 ‘한 경기 팀 최다 타점(26)’에 ‘한 경기 팀 최다득점(27)’이라는 신기록을 동시에 수립했다. 정경배 또한 ‘한 경기 최다 만루홈런’과 ‘한 경기 최다 타점(8)’을 한꺼번에 세우기도 했다. 정경배(鄭慶培)의 첫 만루 홈런은 1회 말 2사 만루에서 김한수가 밀어내기 볼넷으로 선취점을 뽑은 뒤 터졌다. 1997 시즌 처음으로 선발로 등판한 LG의 신인 장문석(張文碩)의 3구 바깥쪽 높은 직구를 밀어쳐 우중간 펜스를 넘기는 만루홈런을 만들어 냈다. 2회 말에는 선두 타자 최익성과 류중일의 연속타자 홈런에 이어 1사 만루에서 구원 등판한 차동철의 초구 높은 슬라이더를 받아쳐 프로야구 사상 첫 연타석 만루홈런의 대기록을 세웠다. 정경배가 세운 연타석 만루홈런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흔치 않은 기록으로 지금까지 단 4차례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에는 전무한 상태. 일본은 ‘1경기 2만루홈런’만 존재할 뿐이다. 그것도 1951년 10월 5일 다이에이(大映)의 이지마가 한큐전에서 1회와 7회에 터트렸을 뿐이다. 삼성은 이 여세를 몰아 5월 10일 김태균(金泰均)이 대전 한화전에서 이상목(李相睦)으로부터 홈런을 빼앗아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팀 통산 1,500홈런을 날린 주인공이 됐다. 뿐만 아니라 8월 17일 잠실 OB전의 신동주 홈런을 기폭제로 9월 2일 잠실 LG전에서 터진 정경배, 양준혁의 홈런에 이르기까지 ‘15경기 연속 홈런’을 터트려 1995년 OB가 수립한 ‘연속 경기 최다 홈런(15)’을 따라 잡는 막강한 공격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백 감독은 9월 3일 LG와의 연속경기 1차전(잠실) 도중 뇌출혈이 재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퇴진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1998년은 1,000승을 달성한 해였다. 4월 22일 해태와의 대구경기에서 시즌 5승째를 거둬 팀 통산 1,843경기 만에 대망의 1,000승 고지에 올랐다. 1,000승을 올리기까지 17년간, 초대 서영무 감독을 비롯해 9명의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또 5월 22일에는 한화와의 대구경기에서 5회말 양준혁의 우전 안타로 최익성이 홈을 밟아 프로야구 최초로 9,000득점을 올리는 경사를 맞았다. 이어 6월 17일 인천에서 벌어진 현대전에서 1회 초 양준혁이 좌전 안타를 터트려 1만7,000안타를 기록하자 5회 말엔 강동우(姜東佑)가 솔로홈런을 날려 1,700홈런을 프로야구 최초로 동시에 달성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1997 시즌 삼성은 안타 1,143개(1위), 홈런 143개(1위), 득점 620점(2위)을 추가, 통산 안타 1만7,681개(LG 16,966), 통산 홈런 1,774개(해태 1,660), 통산 득점 9,458점(해태 8,543)으로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값진 기록은 1만7,000안타와 1,700홈런을 가능케 한 ‘팀 최다 연속경기 홈런기록’이었다. 1998년 6월 1일 대구 현대전에서 최익성의 홈런으로 불을 붙인 연속경기 홈런은 6월 18일 현대와의 인천 경기에서 강동우의 홈런으로 대미를 장식, 16경기 연속 홈런 신기록을 수립했다. 종전 기록도 1997년 삼성이 세운 15경기 연속 홈런(8월 17일∼9월 2일)이었다. 16경기를 치르는 동안 23개의 홈런이 터졌다. 그 중 이승엽은 무려 8개의 홈런을 터트린 끝에 시즌 개인 통산 최다 38홈런을 기록했지만 두산의 용병 타이론 우즈(42개)에게 밀려 장타율 1위(0.621)에 그쳤다. 하지만 양준혁은 1996 시즌에 이어 수위타자(0.342)와 최다 안타(156)를 차지하며 출루율 1위(0.450)까지 거머쥐어 또 한번 3관왕에 올랐다.
연속 | 날짜 | 상대팀 | 장소 | 타자 |
---|---|---|---|---|
1 | 06.01 | 현대 | 대구 | 최익성 |
2 | 06.03 | LG | 잠실 | 이승엽 |
3 | 06.04 | LG | 잠실 | 이승엽 |
4 | 06.05 | LG | 잠실 | 정경배 |
5 | 06.06 | 해태 | 광주 | 이승엽 |
6 | 06.07 | 해태 | 광주 | 신동주 |
7 | 06.08 | 해태 | 광주 | 신동주 |
8 | 06.10 | 롯데 | 대구 | 이승엽 |
9 | 06.11 | 롯데 | 대구 | 신동주, 김한수 |
10 | 06.11 | 롯데 | 대구 | 이승엽, 양준혁 |
11 | 06.12 | 롯데 | 대구 | 이승엽, 양준혁 |
12 | 06.14 | 한화 | 대구 | 강동우, 이승엽, 양준혁, 신동주, 정경배 |
13 | 06.15 | 한화 | 대구 | 양준혁 |
14 | 06.15 | 한화 | 대구 | 이승엽 |
15 | 06.17 | 현대 | 인천 | 강동우 |
16 | 06.18 | 현대 | 인천 | 강동우 |
2000년 5월 25일 청주 한화전에서 임창용이 최연소 150세이브 포인트를 달성했다.
1999년 페넌트레이스는 단일 리그제가 아닌 양 리그제를 채택, 드림리그(현대, 두산, 해태, 롯데)와 매직리그(삼성, LG, 한화, 쌍방울)로 나누어 치러졌다. 페넌트레이스의 결과는 좋았다. 12년 만에 73승2무57패(승률 0.562)로 매직리그 1위를 차지,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98 시즌이 끝난 뒤 대대적으로 트레이드를 단행, 노장진(盧長震), 임창용(林昌勇), 김현욱(金玄旭), 김상진(金尙珍)으로 마운드를 보강한 결과였다. 국민적 타자로 발돋움한 이승엽의 홈런도 상승 기류를 타는 데 크게 한몫을 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 진출 길이 막혀 또 한번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5월 17일 대구 쌍방울전에서 5회말 정경배의 솔로홈런으로 프로야구 첫 팀 통산 1만8,000안타를 달성한 뒤 5회 말 김한수의 만루홈런으로 프로 최초로 팀 통산 9,000타점 고지를 정복했다. 7월 19일(사직 롯데전)에는 1회초 이승엽의 솔로홈런과 3회초 스미스의 투런 홈런으로 팀 통산 1,900홈런을 달성한 뒤 7월 31일(대구 롯데전) 사상 최초로 1만 득점을 성취했다. 특히 8월 8일 대구 두산전에서는 6회 초 시즌 첫 삼중살 플레이를 연출한 끝에 임창용의 세이브로 사상 첫 팀 통산 500세이브를 달성했다. 뿐만 아니라 9월 19일 대구 쌍방울전에서 이승엽의 53호 홈런과 정경배의 18호 홈런으로 한 시즌 팀 최초로 200홈런을 날렸다.
2000년 신기록 행진은 임창용의 최연소 100세이브(4월 14일 대구 해태전)와 이승엽의 최연소·최소경기 150홈런 및 500타점(4월 19일 인천 SK전)으로 시작했다. 임창용 및 이승엽의 신기록 여진이 가시지 않은 4월 20일 인천 SK전에서 5회초에 터진 스미스의 2점 홈런으로 프로야구 사상 첫 팀 통산 2,000홈런을 달성하는 감격을 누렸다. 1982년 MBC와의 개막경기에서 이만수가 유종겸으로부터 첫 홈런을 터트린 이후 2,107경기 만에 대망의 2,000홈런을 달성한 것이다. 또한 7월 7일 대구에서 벌어진 LG와의 경기에서 8회 말 정경배의 솔로 홈런으로 2만9,998루타를 기록한 뒤 이승엽의 2루타에 힘입어 프로 최초로 팀 통산 3만 루타를 달성했다. 특히 9월 1일 SK와의 연속경기 1차전(인천)에서는 이계성(李啓星)의 안타로 대망의 2만 안타를 달성하는 찬란한 금자탑을 세웠다. 이는 1982년 프로야구 개막경기에서 이만수가 첫 안타를 터트린 이후 2,208경기 만에 프로야구 최초로 달성한 신기록이었다. 또한 9월 29일 두산과의 잠실경기를 3 - 1 승리로 이끌어 해태를 뿌리치고 사상 첫 팀 통산 1,200승 고지에 오르는 감격을 누리기도 했다. 2001년에도 삼성은 각종 기록에서 선두를 지키며 다시 한번 명문구단의 위용을 드러냈다. 시즌 초반인 4월 15일 대구 LG전에서 마해영의 득점으로 프로통산 첫 번째 1만1,000득점을 달성했고, 5월 17일에는 홈에서 롯데를 맞아 8개 구단 중 가장 먼저 2,200홈런 고지를 밟았다. 김한수의 솔로홈런이 달성한 기록이었다. 이어 9월 12일에는 박한이의 홈런으로 2,300홈런을 이루었다.
한편 7월 26일 대전 한화전에서 연장 11회에 무려 9점을 뽑음으로써 연장전 1이닝 최다득점 신기록을 세웠으며, 8월 17일 대구 4연속 타자 홈런이라는 진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신기록 행진은 2002년에도 계속 이어졌다. 시즌 시작 15일 만인 4월 20일 인천 문학구장 SK전에서 마해영에 의해 프로야구 사상 첫 번째로 1만1,000타점을 달성한 뒤 10월 20일 광주 기아전 에서 1만1,648타점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한편 5월 5일 수원에서 전병호(田炳浩)가 현대를 상대로 팀 통산 최초의 1,300승을 이룩했으며 10월 20일 김현욱(金玄旭)이 광주에서 기아에 7 - 6으로 이겨 1,366승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또한 노장진은 6월 5일 대구에서 한화를 상대로 팀 통산 600세이브를 프로 최초로 달성했고 6월 6일에는 대구 한화와의 경기에서 강동우가 팀 1만2,000득점을 달성했으며 같은 날 이승엽은 팀 통산 2,400홈런을 쏘아 올렸다. 이승엽은 10월 14일 대구에서 벌어진 기아와의 연속경기 2차전에서 대망의 팀통산 2,500홈런 고지를 정복했고 신인 조동찬(趙東贊)은 10월 20일 홈런 한방을 쏘아 올려 팀 통산 2,511홈런과 1만1,648타점으로 2002 시즌의 대미를 장식했다.